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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로커’, 그렇게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천착해온 ‘유사가족’ 연장선의 한국 영화 <브로커>,
강박적인 환상 속에 매끈하게 봉인된 ‘가족’
등록 2022-06-11 12:27 수정 2022-11-03 11:28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브로커>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버린 성매매 여성과, 베이비박스에서 아기를 데려와 다른 가정에 돈을 받고 넘겨주는 브로커가 우연히 함께하게 된 여행을 따라가는 영화다.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관심받았다. 프랑스 칸에서 먼저 공개된 <브로커>는 배우 송강호에게 한국 최초의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_편집자

*영화 <브로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를 암거래하려는 두 남자, 하루 만에 자기 아기를 되찾으러 왔다가 두 남자의 여정에 동행하게 된 젊은 여자, 그리고 그 여정을 뒤쫓으며 이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려는 경찰.

2022년 칸영화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가 공개된 뒤, 이 ‘유사가족 로드무비’에 대한 평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사회 음지에 은폐된 이슈를 감독 특유의 따뜻한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대면했다는 호평과, 범죄를 순진하고 진부하게 미화했을 뿐이라는 혹평이 팽팽하게 맞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혹평을 염두에 둔 기자들의 질문에 “흑백이 뚜렷이 나뉘는 영화”를 지향하지 않으며 “양쪽이 뒤섞이면서 어느 순간 반전”을 이루는 세계를 상상했다고 밝혔다. 영화의 문제의식은 사회적 편견을 다시 각인하는 재현이 아니라 반문하는 “회색” 지대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의도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호응할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은 <브로커>를 지탱하는 서로 충돌하는 몇 개의 축과 그들의 경계를 점차 용해하기 위해 영화가 도입한 서사적 국면으로 생각을 이끈다.

❶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티브로드 폭스코리아 제공

❶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티브로드 폭스코리아 제공

❷영화 <어느 가족>. 티캐스트 제공

❷영화 <어느 가족>. 티캐스트 제공

가족의 테두리는 어디인가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이를 앞세워 가족의 테두리, 혹은 가능성을 묻는 전작들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했다. 이를테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에서는 6년 동안 키운 사랑스러운 아이가 다른 사람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의 심리적 궁지를 다룬다. 산부인과에서 뒤바뀐 친자를 뒤늦게 찾지만, 그들은 이 아이가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과 함께 살던 가족을 떠나 ‘진짜’ 부모에게 오지만, 어쩐지 버려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낳은 정인가, 기른 정인가. 상투적인 화두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은 느닷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과 시선 또한 존중한 영화의 섬세한 결 덕에 설득력을 얻는다.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지만, 결국 영화 끝에서 혈연을 넘어선 확대된 가족의 형상으로 두 물음을 온건하게 화해시킨다.

<어느 가족>(2018)에 이르면 이 구도에 좀더 복합적인 층위가 생긴다. 혈연관계가 아닌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 어느 날, 정체불명의 어린아이가 들어와 함께 지내게 된다.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생기로운 관계가 작고 낡은 집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들은 자신을 버리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혈연 대신, 새로운 가족을 선택한다. 그러나 고레에다는 이 유사가족을 가족제도의 대안으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몸을 다치거나 해고된 뒤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아이들의 좀도둑질을 방관한다. 제도 바깥에서 이 가족이 지켜낸 활기는 말하자면, 작지만 끈질긴 범법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심지어 할머니가 돌연 세상을 떠난 장면에서 남은 어른들은 그가 남긴 돈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장례 절차 없이 그를 집 안에 매장한다. 이 공동체는 정당한가. 폭력을 은폐한 혈연제도와 도덕과 규범에서 자유로운 철없는 공동체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가족>은 이 물음을 온전히 풀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후반부 연이어 등장하는 극단적이고 갑작스러운 대목이 그 난망함을 드러낸다. 고레에다는 이 공동체를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급진적인 화두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딱딱한 사회적 의제의 대상으로 전환하고 만다. 법의 개입으로 공동체는 와해된다. 어른들 대신 수치심과 죄의식을 짊어지게 된 소년은 자폭하듯 충격적인 선택을 감행하고, 그보다 더 어린 아이는 어떤 저항도 없이 자신을 방치하고 학대한 혈연가족에게 돌아간다. 어른들은 무력하게 감옥에 갇히거나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영화 말미, 아이들은 다시 혼자다. 고레에다는 인물들이 비록 뿔뿔이 흩어졌어도 함께 지낸 시간만큼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며 그의 낙관적인 생각을 믿기는 힘들다.

<브로커>는 어떨까. 아기를 유기한 엄마 소영(이지은), 그 아기를 몰래 입양시켜 돈을 벌려는 세탁소 사장 상현(송강호)과 베이비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동수(강동원). 동수는 말한다. “버린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있지.” 버린 자와 훔친 자 중 누가 더 나쁜가.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를 앞에 두고 이들은 죄의 무게를 겨룬다. 영화가 이들의 무의미하고 뻔뻔한 논쟁에 가담하는 건 아니지만, 고레에다는 서로를 탓하며 대립하는 ‘버린 자’와 ‘훔친 자’를 서사의 두 축으로 세우고 그들을 금세 같은 차에 태운다. 그의 관심은 그중 더 나쁜 자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결핍으로 연결된 존재임을 드러내는 일로 향한다.

❸영화 <브로커>. CJ ENM 제공

❸영화 <브로커>. CJ ENM 제공

❹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CJ ENM 제공

❹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CJ ENM 제공

끔찍한 행로를 코미디적 상황으로 유화해

우선 고레에다는 친엄마와 낯선 두 남자가 아기를 밀매하러 동행하는 끔찍한 행로를 코미디적 상황을 개입시켜 유화한다. 이를테면, 아기를 사러 온 부부가 아기의 외모를 지적하며 돈을 깎겠다고 흥정하고 혹시 아기 아버지가 강간범은 아니냐고 묻는 가혹한 대목은 우스꽝스럽게 연출된다. 배우들의 연기 리듬이나 그 상황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런 의도로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조폭 영화에 등장할 법한 사악한 아기 밀매범이 아닌 허술하고 웃긴 소시민적인 사고뭉치로 그려낸 덕에 실제로 극장 안 관객은 이런 장면에서 번번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여정에서 밝혀지는 인물들의 극적인 전사는 ‘버린 자’와 ‘훔친 자’를 한 맥락에서 공명하게 한다. 소영 역시 버려진 아이였고 성매매로 착취된 삶을 살다 임신해 아기를 낳았지만, 그 아기를 빼앗아가려는 남자를 살해하고 도주 중이다. 영화는 ‘버린 자’의 서사에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코미디 톤의 로드무비에 극단적인 사회범죄 드라마를 끌어들인다. ‘버린 자’의 과거가 사회범죄 드라마에 빚지고 있다면, ‘훔친 자’의 과거와 현재에는 멜로드라마의 우울이 새겨진다. 상현은 초반에는 건달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아기 암거래를 계획한 비루한 인간처럼 그려진다. 후반부, 그가 오랜만에 딸을 만나 안절부절못하는 애처로운 장면에서 그에게도 브로커 일을 무릅쓴 간절한 이유가 주어진다. 상현은 아내와 딸에게 버려졌으나 그들과 다시 함께 살 날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러나 과거를 결코 되돌리지 못할 초라한 이혼남이다.

같은 무게로 놓는 ‘아기 유기’와 ‘임신중단’

동수에게도 사연은 있다. 셋의 여정은 의아하게도 어느 보육원에서 잠시 멈춘다. 영화는 이내 그곳이 동수가 어린 날을 보낸 보육원이며, 여기 사는 아이들에게 그는 영웅 같은 존재임을 상기한다. 동수의 엄마는 보육원 바깥 한구석에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상현이 동수의 과거를 소영에게 일러준다. 보육원 장면 이후 동수는 누구보다 소영의 아기에게 애정을 보이며 소영을 통해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아기를 밀매하려는 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육원에 굳이 들러 아이들과 어울린다는 이상한 설정은 동수의 지난 행동에 얼마간 면죄부가 될 만한 서사를 안긴다.

‘버린 자’와 ‘훔친 자’가 공동의 운명을 나눠지고 심리적으로 융화되는 동안에도 영화에는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축이 남아 있다. 셋을 줄곧 미행하던 수진(배두나)과 이 형사(이주영)는 아기가 밀매되는 현장을 포착하려고 상황을 유도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소영을 체포하는 일보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범죄를 기다리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수진에게는 “멋대로 낳고 멋대로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오랜 원한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사연은 나오지 않는다. 수진이 소영과 마주한 밤, 수진의 날카로운 추궁에 소영이 반문한다.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낳기 전 죽이는 죄가 더 가벼워?” 소영의 선택을 범죄드라마의 인과 안에서 이해하며 연민을 실어주던 영화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그의 마음에 수긍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영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한 것이라 해도 이 대사의 억지스러움과 위험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아기 유기와 임신중단은 같은 시소에 올려두고 무게를 비교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소영의 희생정신과 모성을 비추기 위해 영화가 동원한 이 반문은 임신중단 권리에 손쉽게 죄를 입힌다. 그 태도는 감상적이고 무지하다.

<브로커>가 무리한 논리를 끌어들이며 인물들에게 진부한 전사를 덧씌워 닿으려는 목적지는 어디일까. 후반부, 그들의 급작스러운 결단과 서사의 급변한 흐름은 ‘버린 자’ ‘훔친 자’, 그리고 이들을 쫓는 자의 도덕적 결함을 한꺼번에 정화하려는 영화의 시도일 것이다. 영화는 아기를 둘러싸고 죄의 경중을 말하던 철모르는 이들을 이제 아기를 중심으로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몰두한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 버렸다는 소영의 앞선 주장에 화답하듯, 에필로그에서 인물들 모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아기의 선한 보호자가 돼 있다. 심지어 이 아기를 돈으로 입양하려다 경찰이 짠 덫에 걸려 발각됐던 부부의 모습마저 보인다.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도덕적 결함을 정화하려는 무리수

아기의 “미래에 대해 다 같이 의논하면 좋겠”다는 수진의 마지막 음성은 그러나, 유기와 밀매의 그림자로 얼룩졌던 세계가 한순간 맞이한 성숙한 도약의 깨달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결말은 영화가 토대로 삼은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착한 어른과 무결한 유사가족에 대한 다소 강박적인 환상 속에 매끈하게 봉인해버린다.

<브로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꿈꾼 선의로만 기능하는 공동체 혹은 연대의 형상은 혈연중심적 가족주의 환상만큼이나 낡고, <어느 가족>에서 좀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던 비도덕적 비혈연 공동체보다도 퇴화한 세계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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