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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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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영농과 ‘조치원 맥가이버’의 탄생

목마른 얼치기 농사꾼, 버려진 우물물을 모터로 끌어오다
등록 2022-06-07 09:05 수정 2022-06-15 09:22
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만든 물 펌프 세트. 강력한 힘이 만족스럽다.

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만든 물 펌프 세트. 강력한 힘이 만족스럽다.

충청권엔 극심한 봄가뭄이다. 하늘이 우중충한데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3주 전 심은 고춧잎이 누렇게 떴다. 적상추는 마치 이끼처럼 땅에 붙어 도무지 자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 좀 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내 마음도 타들어간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밭농사에 필요한 물을 하늘에만 기댈 순 없다. 그렇다고 몇백만원을 들여 내 소유도 아닌 밭에 시추해 지하수를 끌어올릴 순 없다.

다행히 밭에서 80여m 떨어진 곳에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다. 늦가을이면 투명한 막에 싸인 도롱뇽 알이 떠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 밭 아래 사는 주민 황씨가 “상수도 놓이기 전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쓰던 우물”이라며 재주껏 밭까지 물을 끌어다 써보란다. 처음엔 양동이로 물을 퍼다 밭에 뿌렸다. 작열하는 뙤약볕에 비지땀 뻘뻘 흘리며 서너 번 나르다 지쳤다. “이러려고 내가 농사짓는 게 아닌데….” 작물 살리려다 내가 죽게 생겼다.

5년 전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 농약, 비닐,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3무 농사’와 함께 마음속에 새긴 다짐이 있다. 바로 기술영농의 꿈이다. 하늘만 바라보지 말고 날이 계속 가물 땐 기술을 이용해 물을 끌어다 쓰자는 거다. 꾀를 냈다. 한창 겨울 캠핑 다닐 때 쓰던 온수매트용 12V 순환모터에 3만원 주고 산 100m 길이 호스를 연결해 밭까지 물을 날랐다. 편하긴 한데 물을 끌어오는 속도가 영 시원찮다.

인터넷에서 폭풍 검색을 한 끝에 다이어프램(가름막) 방식의 모터가 물이나 기름 같은 유체를 매우 힘차게 뿜어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만원을 투자했다. 이 녀석 참 신통하다. 100W짜리인데, 1분에 무려 8ℓ의 물을 운반한다. 1ℓ 페트병 8개에 해당하는 양이다. 우물보다 밭이 2m 정도 높은 데 있고, 호스 길이가 100m인데도 물을 잘도 밀어 올린다. 이 정도면 모터에 1시간만 일을 시켜도 작물에 물을 듬뿍 주는 데 부족하지 않다.

소중한 농사 자산이 된 녀석한테 집도 만들어줬다. 평상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 목재로 틀을 짜 펌프를 안정적으로 고정하고 12V 12A짜리 축전지가 들어갈 자리도 만들었다. 내 밭을 찾는 방문객들은 얼치기 농군의 이 영농기술 결정체를 보곤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엊그제는 내 작품을 개량했다. 모터의 음극과 양극을 악어클립으로 축전지에 바로 연결하는 1세대 방식을 벗어나기로 했다. 드릴로 목재에 구멍을 뚫어 선을 매립하고 캠핑용 온수매트 순환기에 쓰던 똑딱이 스위치도 달았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나를 지켜보던 작은아들이 한마디 한다. “아빠는 조까이버야.” 처음엔 욕하는 줄 알았다. “조치원 맥가이버, 줄여서 조까이버라고.” 칭찬으로 새겨듣기로 했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기자 symbio@hani.co.kr

*농사꾼들: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한겨레> 김완, 전종휘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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