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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앞선 시대’의 ‘시대를 앞선’ 여성들

제1371호
등록 : 2021-07-09 17:24 수정 : 2021-07-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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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시대의 화두다. 일상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법규와 관행의 장벽을 허물고,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한 제안과 실천이 쏟아진다. 한편에선 ‘여풍’에 대한 ‘백래시’(역풍)도 거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숱한 희생과 좌절을 겪었고 그 위에 조약돌처럼 작은 성취가 쌓여 큰 석탑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어땠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만 봐도, 대다수 여성이 엄격한 신분제 계급사회와 숨 막히는 남녀유별의 도덕률에 운명적으로 묶인 채 속만 삭이며 살았을 것, 이라는 게 상식에 가까운 통념이다. 정말 그랬을까? 한국학 연구자 이숙인은 신간 <또 하나의 조선>(한겨레출판)에서, 그런 통념이 구멍투성이일 뿐 아니라 사실 왜곡일 수 있음을 실증해 보인다. 실존 여성들에 대한 당대 문집, 일기, 간찰, 행장 등 다양한 문헌 기록이 뒷받침됐다.

책에는 전체 4부에 걸쳐 조선 여성 52명이 나온다. 밑바닥 여종에서 왕비까지, 남녘 산골 촌부에서 한양 마님까지, 십 대 소녀에서 여든 할머니까지 아우른다. 정사(正史)나 실록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들 “각자의 이야기는 ‘조선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이란 착시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 지은이는 “주인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삶과 생각, 고통과 애환, 꿈과 희망을 주의 깊게 들으려” 했다. 그들 역시 ‘구체적으로 살고 입체적으로 존재’(1부)했던 인간이자, “각기 다른 환경과 맥락 속에 놓인 감정과 욕망의 주체”였다. ‘성녀와 마녀의 프레임을 넘어’(2부), ‘닫힌 운명에 균열을 내고’(3부), ‘시대의 틈에서 ‘나’를 꽃피우고’(4부) 간 여성이었다.

500년 전 경북의 신천 강씨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첩을 들인 남편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다산 정약용의 부인 홍혜완(1761~1838)은 남쪽 끝 강진 유배 생활이 길어지는 남편에게 혼인할 때 입었던 30년도 더 된 다홍치마를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절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16세기 사족 이문건이 남긴 집안 여비(女婢) 춘비에 대한 세세한 기록도 흥미롭다. 춘비는 괄괄한 성격인데, 35살 때쯤 몸에 종기가 퍼져 두 달 만에 죽기 직전 쇠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생전 한 번은 일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또래인 상전 아들에게 매를 맞고는 “독을 뿜어대며 울부짖고 마구 악”을 쓰며 드러누웠다가 다음날 더 심한 매질을 당했다.

지은이는 허난설헌, 황진이, 대장금, 논개, 정순왕후 같은 전설적 위인뿐 아니라, 사약을 받은 악녀 장희빈, 환향녀 윤씨, 집단광기의 제물 신숙녀, 아름답고 음란했던 낙안 김씨, 마을의 근심을 위로했던 무녀 등 낙인찍힌 여성들을 ‘앞선 여자’로 새롭게 조명한다. ‘앞선 시대’의 여성들이자 ‘시대를 앞선’ 여성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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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
이상미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1만7천원

서양예술사 전공자가 에펠탑(프랑스), 브란덴부르크문(독일), 런던탑(영국), 콜로세움(이탈리아), 크렘린궁전(러시아) 등 28개 유명 건축물에 얽힌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대 로마부터 20세기 냉전까지, 상흔을 새기며 살아남거나 재건된 건축물은 전쟁의 생존자이자 생생한 증언자다.

과학의 자리
김우재 지음, 김영사 펴냄, 2만4800원

‘초파리 유전학자’로 잘 알려진 지은이가 “과학기술 시대, 왜 한국에는 과학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학사와 철학, 과학기술과 정책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물고 과학의 참쓸모를 탐색한다. “과학은 현학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양식으로 다가올 때 더 큰 가치를 갖는다.”

반전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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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반전은 인생의 묘미이자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브랜드 전략가가 커뮤니케이션과 상업광고 사례들에서 품격 있는 반전의 열쇳말 15가지를 뽑아냈다. 자비(자신을 낮춤), 생력(힘 빼기), 의지, 수긍, 유연, 은폐, 도치, 과장, 삭제, 모순, 갈등, 긍정 등 전복적 사고의 힘.

신성한 소
다이애나 로저스·롭 울프 지음, 황선영 옮김, 더난출판사 펴냄, 1만7천원

채식주의는 윤리적 선각자의 표징일까. 인간은 260만 년 전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해 잡식성 동물로 진화했다. 육식이 제공하는 고효율의 영양소 덕분에 비약적인 두뇌 발달이 가능했다. 영양사와 생화학자인 지은이들은 윤리적 육식을 강조하며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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