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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 ‘매너온도’ 99℃의 정체

당근마켓 중독기 ② 당근마켓에서 얻은 이웃 회복의 실마리
등록 2021-04-25 07:36 수정 2021-04-28 02:12
도우리 제공

도우리 제공

어느 날 ‘매너온도’가 99℃인 사람에게서 500원짜리 에코백 두 개와 무료나눔용 호신용 호루라기를 거래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대체 매너온도가 99℃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내 메시지 끝마다 ‘친절하시네요’라는 칭찬, 자신의 실명과 휴대전화 번호까지 남기는 등 과한 친절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조금 기대됐다. 직거래 현장에 나타난 그는 물건값과 함께 다단계업체 상품 팸플릿을 건넸다. 다른 때였으면 곧바로 거절했을 그 팸플릿을 1천원 지폐와 함께 쥔 채 집으로 향했다. 원하지 않은 영업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돌아서서 오는 내내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매너온도가 99℃인 사람들과 만났다. 그중 한 사람에게 산 파우치에는 큰 얼룩이 있었는데, 항의하려고 보니 대화방이 사라져 있었다. 조금 알아본 바로는 판매한 상품을 거래 완료로 전환하기 전 무료나눔으로 변경해 매너온도를 쉽게 올리는 수법이 있었다. 거래 당시 그 사람의 판매 내역이 모두 가려져 있던 것도 무료나눔 변경 사항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의심이 들었다. 다단계 팸플릿을 건넨 사람의 판매 내역도 모두 숨김 처리돼 있었기에 이러한 심증을 굳혔다. 또 다른 매너온도 99℃ 판매자는 첫인사를 생략하는 등 친절한 편이 아니었는데, 대신 해외 희귀 상품인 중고물품을 853건이나 올려놓고 있었다.

이런 경험으로 영업 수단으로서 친절 같은 ‘매너’가 아니라 판매율을 높이기 위한 꼼수, 수요가 많은 상품 물량 확보 등의 조건도 매너를 구성한다는 걸 알게 됐다. 다단계 팸플릿을 건네받았을 때 찜찜했던 것도 매너가 상대방을 향한 존중이라기보다 ‘매너 자본’이 됐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얼마 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맥주를 들이켜며 내 동네 후보별 득표율을 보면서 ‘여기서 더 오래 살기는 글렀구나’ 씁쓸해하다가 습관적으로 당근마켓 앱을 켰다. ‘동네 인증하고 시작하기’ 알림이 떴는데, 문득 내가 동네 주민이라는 정체성으로 이웃들과 무언가를 주고받아본 게 어릴 때를 빼고는 당근마켓이 유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도 지역 정체성이 옅은 인천이었다. 서울 와서는 언제든 이사 갈 수 있다는 전제로 지냈다. 동네 골목길에 목련이 만개한 사진, ‘생김 가져가면 구워주는 가게’ 같은 정보는 당근마켓 플랫폼의 ‘동네생활’ 피드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사진).

당근마켓 미담도 그랬다. 바퀴벌레를 잡아주었다거나 지붕에 떨어진 캐릭터 인형을 주워주고, 옥상에 갇혔을 때 문을 열어주는 등의 ‘생활밀착형’ 문제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개념인 ‘이웃’의 몫이다. 당근마켓 미담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이웃과의 연결이 점점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일이라서다. 이러한 당근마켓의 매너, 미담, 커뮤니티는 품앗이, 재능기부, 협동조합 같은 사회 서비스와 행정 등 이미 시민의 삶에 요구돼온 개념이기도 하다. 당근마켓은 이제는 너무 멀어져버린 동네 구성원 간 거리를 매너온도라는, ‘시민에게 주는 당근’으로 이어 붙이는지 모른다. ‘시민 의식’도 이제 ‘앱 속 정서’가 돼가는 걸까. 앱이 없더라도 내 근처 마켓 외에, 서류상 주민이 아닌 동네 일원으로서 이웃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고 싶다.

도우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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