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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실 이전에 ‘식인’이 있었다

2차 대전에 관한 통념을 깨는 연구
<피에 젖은 땅-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등록 2021-03-13 08:38 수정 2021-03-14 02:32

인류 전쟁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단연 독보적이다. 이 전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자 사상 최대의 살육전이었다. 교전국들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최신 과학기술로 만들어낸 살상무기의 파괴력은 압도적이었다. 죽음에 전후방이 따로 없었다. 교전 당사자인 연합국(미국·영국·소련 등)과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 등) 양쪽에서 7천만~8500만 명이 전투와 학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은 ‘선악 대결’ 구도가 지배적인 기억이자 일종의 공식으로 굳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정의·자유·민주주의가 불의·억압·전체주의에 승리한 전쟁이라는 해석은 신화에 가깝다. 특히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나치의 민간인 학살에서 야만성은 그런 서사에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는 전체 진실의 아주 작은 일부이거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미국과 영국의 역사학자가 각각 쓴 <피에 젖은 땅-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함규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과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김덕련 옮김, 오월의봄 펴냄)는 이 전쟁에 대한 오랜 통념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연구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학살을 하나로 봐야

티머시 스나이더는 <피에 젖은 땅>에서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만 1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민간인 학살의 거대하고 끔찍한 비극을 정교하게 다시 들여다본다.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계획적 학살을 저지른 지역은 폴란드와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3국에 집중됐다. 전쟁 시기 이 지역은 문자 그대로 ‘피에 젖은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였다. 스나이더는 영어, 독일어, 이디시어, 체코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등 10개 언어로 쓰인 자료를 섭렵하며 학살의 참상을 고스란히 들춰내고 일일이 기록했다. 학살자들의 문서 기록, 희생자들의 일기와 편지, 생존자의 증언은 차마 입에 옮기기 힘들 만큼 끔찍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학살의 서막은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인 1930년대 초에 열렸다. 희생자 대다수는 동유럽 유대인이 주축인 비무장 민간인과 전쟁포로였다. 나치가 폴란드에서 운영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오늘날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수십 배 많은 사람이 블러드랜드 곳곳에 있는 독일의 ‘살인 공장’과 소련 점령지로 끌려와 죽었다. 학살이 효율적인 ‘살인 공정’이었던 것도 아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스나이더는 극우 파시스트 히틀러와 극좌 독재자 스탈린이 벌인 학살을 별개의 사건이 아닌 하나로 묶어서 봐야 비극의 전모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탈린은 계획경제의 토대인 산업화·집단화를 추진하면서 점령지 주민의 뼛골까지 빼먹는 수탈과 추방, 할당량까지 지시한 처형으로 이른바 ‘부농’을 수백만 명이나 죽음으로 몰아갔다. 나치도 ‘기아 계획’을 세우고 1941~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굶겨 죽이기 다음에는 총살이 집행됐고, 그다음은 가스실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선 굶주린 사람들이 ‘식인’으로 연명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가족이 가장 약한 식구를 잡아먹었다. 보통 어린애들이었다. (…)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갔다.” 거적때기를 덮어쓴 소년소녀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기다렸다.

‘블러드랜드’ 비극의 씨앗은 2차 대전 발발의 배경에 뿌리가 닿는다. 전쟁 전 대륙 제국이던 소련과 독일은 해양대국인 영국이 이미 판을 짜놓은 세계 패권 구도의 틈새시장을 찾았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해답은 똑같았다.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시민”이 필수였다. 스나이더는 전작 <블랙 어스>(열린책들 펴냄, 2018)에서 이런 배경을 뛰어나게 설명했다. 블랙 어스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토양(흑토)’인 동시에, 동유럽 유대인의 유폐지였다가 결국 거대한 무덤이 된 ‘검은 땅’이었다. 히틀러가 말한 ‘레벤스라움’(독일인의 생활공간)이 블러드랜드와 일치한다. 그곳에서 “유대인은 흑사병보다 더 나쁜 정신적 유행병”(히틀러)이었으며, 부농과 소수민족은 ‘계급과 민중의 적’(스탈린)이었다. 생명을 키우는 곡창지대가 바로 그 이유로 죽음이 넘쳐나는 땅이 되고 만 것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다.

스페인 내전은 이미 세계대전

<피에 젖은 땅>이 민간인 대학살을 재조명했다면,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는 민중이 주체가 된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 지은이 도니 글룩스타인은 2차 대전에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전쟁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던 ‘제국주의 전쟁’, 다른 하나는 파시즘·야만·압제에 맞서 민중이 민중을 위해 수행한 민중전쟁이다. 승자의 시각과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 민중의 시각으로 전쟁을 해석한 것이다. 지은이는 2차 대전의 진짜 시작을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찾는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에 맞서 스페인 노동계급을 지원하기 위해 전세계 53개국 출신 3만2천여 명의 국제 여단 자원자가 스페인 땅에서 총을 들었다. 이미 세계대전이었던 셈이다. 특히 프랑코 파시즘,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은 초기부터 연결돼 있었다. 주류 학계에서 스페인 내전이 2차 대전사에서 배제된 것은 연합국 정부들이 무기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의 본막이 오른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유대인을 구조할 생각이 없었고, 영국은 나치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큰 위험으로 여겼다. “처칠은 나치 부역자들을 반파시스트와 레지스탕스보다 선호했다.” 프랑스 비시 정권은 노동계급을 진압하기 위해 히틀러에 부역했다.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면서 “폴란드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강변했다. 독일과 소련의 침공으로 폴란드인 21만6천 명이 사망했다.

두 학자가 학살의 불편한 진실과 민중의 전쟁에서 진짜로 보려고 했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무게와 존엄이었다. 글룩스타인은 한 일본인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사망자를 숫자로 개조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각각 개인이었다.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스나이더도 같은 말을 했다.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추정치가 돼버렸다. (…)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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