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여기 새댁 돈이 어느 것이요”

세치 사려고 채소 판 돈 모았는데 돈 받은 생선장수가 모른 척
등록 2021-03-06 13:03 수정 2021-03-12 01:33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돈이란 아구가 차면 없다 생각하고 쓰지 말아야 돈을 모을 수 있다.” 목돈을 깨서 조금조금 쓰다보면 부스럭돈이 되고 다 없어지고 만다고 하십니다. 잔돈푼을 잘 쓰는 사람은 목돈이 필요할 때는 돈이 없어서 평생 아무 일도 못하고 산다고 하십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돈이 모인다고 라면을 끓일 때도 라면만 넣지 말고 국수와 섞어서 삶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시든 배추를 버리니 “심보가 나쁘다”

내가 돈을 헤프게 쓸까봐 은근히 압력을 넣었습니다. 어머니는 말뿐이 아니라 실행력이 강해서 장날마다 쌀을 팔고 농산물을 팔아 목돈이 마련되면 돈을 움켜쥐고 그대로 집으로 가셨습니다.

뭐든 아끼는 데는 내 것 네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장날 단골손님 아줌마를 보더니 간 뒤에 저 아줌마는 심보가 아주 나쁘니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 좋은데, 왜? 뭐가 심보가 나쁜데?” 했더니 쌀 팔러 갔는데 멀쩡한 배추를 좀 시들었다고 쓰레기통에 확 버리더랍니다. 또 어느 날은 갔더니 허연 쌀밥을 한 그릇이나 쓰레기통에 버리더랍니다. 못 먹게 됐으면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뭐, 했더니 그래도 사람이 못 먹으면 어디 짐승이라도 주지 그럴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버리는 것을 하도 질색하셔서 나도 사람들이 먹으라고 갖다주는 채소 같은 것을 다 못 먹을 때는 어머니한테 들킬까봐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한 주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당근도 가져오고 무와 양배추를 많이 갖다주었습니다. 장사한 지 몇 년 되니 파는 데는 이골이 났습니다. 얻은 채소를, 내 것 판다 하지 않고 친척이 팔아달라고 맡겼다고 단골집들에 사지 않겠냐고 하니 이집 저집에서 사갔습니다. 공짜로 생긴 채소 판 돈으로 장날에 세치(임연수)를 몽땅 살 생각입니다. 세치를 여러 손 사서 연탄불에 바삭하게 구워도 먹고 달콤 짭조름하게 조려서도 먹을 생각입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서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평창은 생선이 귀했습니다.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넘어오는 자반고등어와 세치는 우리 친정 식구들이 최고 반찬으로 칩니다. 장날이면 생선이나 귀한 식품을 5일치 삽니다. 장에서 사면 가게보다 훨씬 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날이면 오전에 한 번 시장을 돌아보고 오후 늦게 가서 떨이로 싸게 사곤 했습니다.

그날은 일찌감치 세치를 사놓았다가 아버지가 장에 오시면 바삭하게 구워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세치는 바삭하게 구우면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아 친정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생선입니다. 세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강릉에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치 껍질로 쌈을 싸 먹다가 집안이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치 네 손 돈이 눈앞에서 슥

장에 가니 단골 생선가게 아줌마가 오늘따라 더 좋은 물건을 많이 가져온 것 같습니다. 벌써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아줌마 세치 네 손만 주세요” 하고 돈 먼저 냈습니다. 아줌마는 벌써 많이 팔아 두둑한 앞치마 주머니에 돈을 밀어넣습니다. 아줌마가 세치 네 손을 싸주면서 돈을 달라고 합니다. “아줌마, 돈 먼저 드렸잖아요.” “새댁, 돈을 언제 냈다고 그래? 나는 돈 받은 적이 없는데.” 아줌마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보이며 새댁 돈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다 똑같은 돈인데 내 돈이라고 쓰여 있지도 않고 표시도 없었습니다.

내 돈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세치 네 손 값을 냈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나물 팔던 할머니가 새댁이 돈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이 새댁과 한통속이냐고, 받은 적이 없는 돈을 받았다고 편든다고 언짢아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아니라고 해서 울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도 엄마가 우니 덩달아 많이 울었습니다. 시장 골목을 울면서 지나니 아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흘끔흘끔 보며 지나갔습니다. 집에 와서도 억울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방구석에 숨어서 눈이 붓도록 울다가 남편한테 들켰습니다.

남편은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합니다. 세치를 사려고 돈을 냈는데 안 받았다 하여 돈을 떼이고 그냥 왔다고 했습니다. “많이 속상하겠다. 내가 세치 네 손 사줄 테니 그만 울어” 하였습니다. 돈을 주면서 가서 세치 사다 먹고 다음에는 절대로 돈 먼저 내지 말고 물건을 받아 들고 돈을 내라고 했습니다. 속상해도 공부한 셈 치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가끔 나도 돈을 안 받은 것 같은데 돈을 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찜찜하지만 믿어줬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거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날따라 친정어머니도 장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오셨으면 내 편이라도 들어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돈을 떼이고 말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치 먹을 때마다 놀리는 남편

오후에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업고 생선가게 아줌마를 찾아갔습니다. 장꾼들이 많이 집으로 돌아가고 시장은 한산해졌습니다. 나는 분명히 돈을 냈으니까 세치도 필요 없고 돈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돈은 채소를 팔아서 세치를 사먹으려고 마련한 특별한 돈이었다고 했습니다. “아줌마 그 돈을 떼이면 나는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아요” 했습니다.

“글쎄, 새댁이 또 찾아온 것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했습니다. “아줌마,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대 정말로 돈을 냈어요” 하니 옆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가 자기는 나물이 잘 안 팔려서 생선이 잘 팔리는 아줌마만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댁이 세치 네 손 값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니 앞치마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물 파는 할머니도 봤다 하고 나도 자꾸 내 돈 내놓으라고 하니, 생선 파는 아줌마도 자기가 잘못 안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기왕 세치를 사먹으려고 했던 건데 한 손 더 줄 터이니 그냥 세치로 가져가라고 싸주었습니다. 사람이 재수가 없어서인지 바보 같아서인지 정말로 내 돈 내고 바보 같고 아주 치사한 하루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세치를 먹을 때마다 남편한테 놀림을 받았습니다. 가게에서 손님이 돈 먼저 내려 하면 물건 받으면서 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드시 물건 받고 돈 내는 것을 철칙으로 살고 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작가·<강원도의 맛>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