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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사실은 누구의 무기인가

등록 2021-03-03 16:01 수정 2021-03-04 07: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대담장 분위기는 팽팽했다. 때는 2004년이었다. 고조선과 고구려가 한국도 중국도 아닌 요동이라는 지역공동체에 속한다는 학술연구서가 나왔다. 한·중 양국의 ‘국뽕주의’ 입장에서는 이 ‘요동사’가 마뜩잖았다. 특히 한국 사학계는 더했다. 고조선은 한국사 기원이며, 특히 고구려는 당시 팽창하던 대한민국의 기세만큼 의미도 높아지고 있었으니, 이 책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연구자인 김한규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해온 상황. 그러니 대담 당사자 외에 유일하게 이 대담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니

상대 대담자인 김기봉 교수(경기대 사학과)는 민족주의 역사관의 문제를 드러내려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자. 그에게 ‘요동사’라는 제3의 입장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호적인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어딘지 모를 묘한 전선이 느껴졌다. 요동사 의미를 근대 국가주의의 해체로 설명하려 할 때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연구에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고구려는 한국사의 일부이기도, 중국사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요동사 위에서 설명할 때, 그 실체가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죠.”

거칠게 말하면 고조선과 고구려가 요동사라고 말하는 건 ‘주장’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중국사 속에 설명되는 게 더 사실에 가깝거나, 한국사 속에 설명되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우면 그렇게 설명할 거라는 말이었다. 한쪽이 의도로 당기면, 한쪽은 사실로 버티는 국면. 진보적 계간지를 담당하는 에디터였던 나는 당연히 강요된 국사(國史)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대담 내내 나오는 ‘사실’이란 단어가 주는 즐거운 해방감이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니’의 뜻을 드디어 알게 된 기분이랄까.

오늘날 우리는 ‘관점’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하나의 사실도 누구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 익숙한 시대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학폭 가해자와 학폭 피해자가 있다고 하자. 당연히 가해자에게는 합당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합당한 처벌인가. 그 처벌은 언제 종결될 수 있는가. 그 여부가 모두 ‘사실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사실을 모르면 1년형도 과할 수 있고, 사실을 알면 10년형도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이 무엇이냐’를 묻는 일 자체가 가해자의 것이라는 비판이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권력이 없는 이들의 전략

구체적 사실이야말로 원래 힘없는 자들의 무기였다. 누군가 절도죄로 1년형을 받았다고 하자. 이것만 보면 그 사람이 금은방이라도 턴 줄 알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실을 들여다보면, 가난한 엄마가 배고픈 딸을 위해 쌀 한 포대를 훔쳤는데 전과로 인한 가중처벌로 형이 길어졌을 수도 있다. 근무 태만으로 정당한 절차에 따라 회사에서 해고됐다. 그러나 구체적 사실을 들여다보면, 이 사람은 원래 채용된 업무와 다른 곳에 배치됨으로써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사실이 무엇인지 더 많이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없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상대적 진리가 있을 수는 있지만 ‘추구의 대상’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언제부터 진리가 사실이 아닌 관점이 되고 있는가. 진리는 진실이며, 진실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는 원칙을 버리면 과연 누구에게 더 유리할까. 사실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20년 가까이 지난 그날의 대담이 자꾸 생각나는 시절이다.

김보경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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