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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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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내일, 내 일, 내일들

다양한 형태의 ‘일하는 여성’ 모습 <내일을 위한 내 일>,
90년대생 여성을 만난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등록 2021-01-25 14:21 수정 2021-01-27 23:38
한겨레출판 제공

한겨레출판 제공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종종 감지한다. 때론 운동의 모습으로, 때론 저항의 모습으로, 때론 연대의 모습으로 이 목소리들은 나타난다. 으레 남성 몫으로 여겨졌던 자리에 여성이 서고, 여성 서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시도도 더디지만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충분치 않다. 2020년 국내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패널에 여성이 한 분도 없는 점을 대신 사과드린다”고 했던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학 교수의 발언은 상징적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여성이 이토록 희소한데, 내 주변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다.

젠더 이슈가 사회 주요 의제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의 삶에선 “롤모델로 삼고 따를 만한 여성 선배가 없다”거나 홀로 분투하기보다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또래 여성을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은 여성에게서 튀어나왔던 이유다. 이들은 애타게 목말라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원했다. 다양한 분야, 각기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더 많은 삶의 안내자를 필요로 했다.

‘심드렁’도 일을 지속해나가는 방법의 하나

최근 나란히 출간된 인터뷰집 <내일을 위한 내 일>(이다혜, 창비)과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유선애, 한겨레출판)은 이 ‘타는 목마름’에 응답한다. 각자 다른 경로를 걷는 여성의 이야기가 시원하고 달큰한 물처럼 목을 적신다. 여성이 여성을 인터뷰한 뒤 이를 모아 묶어냈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내일을 위한 내 일>은 다양한 형태로 ‘일하는 여성’의 모습에,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은 기존 규범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직조해나가는 ‘1990년대생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내일을 위한 내 일>은 이다혜 <씨네21> 기자가 만난 일하는 여성 이야기다. 그는 영화감독 윤가은, 배구선수 양효진, 바리스타 전주연, 작가 정세랑, 경영인 엄윤미, 고인류학자 이상희, 범죄심리학자 이수정을 만났다. 연령과 분야를 가능한 한 다양하게 구성하면서도 “동시대에 한창 일하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담으려 했다고 한다. 그 덕에 7명의 이야기는 내 일을 찾고 싶은 사람, 이제 막 내 일을 시작한 사람, 새로운 일을 탐색하는 사람, 커리어를 더 발전시키고 싶은 사람, 내 일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정표가 된다.

인터뷰이들은 일터에서 각자가 터득한, ‘일을 지속해가는’ 나름의 방법을 털어놓는다. 윤가은 감독은 “결과는 반 이상은 운이어서 과정을 잘해놓으면 잘한 것은 봐줄 거고 아닌 것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도 영화감독이란 확신이 “백 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한다. “누구도 내 일에 확신을 주지 않고,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효진 선수는 2019∼2020 시즌 최초로 통산 1200 블로킹 기록을 세우고 같은 시즌 생애 첫 엠브이피(MVP)를 거머쥔 여자배구 간판스타지만, 그 역시 프로팀에 와서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내가 작아지는 느낌을 겪고 저 선수보다는 못 미친다 해도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19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전주연씨는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은 경험을 나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작해서 10년을 했더니 자연스럽게 잘하는 일이 되더라”는 그는 개인적인 목표로 시작한 일이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확장될 때의 기쁨을 말한다.

이 밖에도 작가 정세랑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큰 테두리만 생각”하며 “옮겨 다니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언을, 벤처기부펀드 C프로그램 대표 엄윤미는 다양한 조직에서 일해보고 “쓰는 근육이 다른”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회사 바깥의 가능성을 상상해본 경험을 전한다. 이상희 교수의 궤적을 좇다보면 “재능이 있나,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에 매이기보다 고민을 그만두고 심드렁하게 계속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는 비결임을 알게 된다. 이수정 범죄심리학자는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고 이를 준거로 삼을 때, 일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확장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다시 살고 싶다”는 기분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속 여성들은 ‘90년대생’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프로듀서 겸 디제이(DJ) 예지, 소설가 김초엽, 뮤지션 황소윤, 피디(PD) 겸 엠시(MC) 재재, 다큐멘터리 감독 정다운, 배우 이주영, 사이클 선수 김원경, 패션모델 박서희, 영화감독 겸 작가 이길보라, 작가 이슬아의 이야기가 담겼다. 인터뷰어로 나선 유선애 <마리끌레르 코리아> 에디터는 90년대생 여성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새롭게 다시 살고 싶다”는 기분에 휩싸였음을 고백한다. “‘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생존의 중요한 기준이자 목표로 삼고, 기존 시스템에 속하기보다 이를 응용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활력과 희망, 결연함을 동시에 봤다.

실제로 인터뷰 속 90년대생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그동안 기성언론이 호명해왔던 것처럼 ‘꿈이 없고, 포기하고, 탕진하고, 무기력한 세대’의 모습은 없다. 대신 이들은 “내가 나대로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이주영)거나 “내가 붙인 내 이름을 내가 믿는 게 중요하다”(이길보라)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상처로 만들지 않을 힘이 나에게 있다”(이슬아)고 말한다.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단단한 신념도 갖고 있다. “강함이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재재)이고 “변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변화를 가장 크게 가로막는다. 변화는 다양한 형태의 물결로, 모양으로, 크기로 온다”(예지)는 점을 이들은 인지하고 있다.

바라던 내일을 오늘로 만드는 용기를 얻고 싶다거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실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다채로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권한다. “진보와 퇴보 모두 가능한데 그건 결국 지금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란 김초엽의 말처럼, 지금 삶의 다양한 선택지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두 책은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사계절 펴냄, 1만7800원

신체 손상을 보완하는 기계들과 함께 살아왔기에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말하는 김초엽(보청기)과 김원영(휠체어)이 사이보그휴먼의 현재와 미래를 그려낸다. 김원영은 기술 불평등의 구체적 현실을 보고 표준 너머를 상상하며, 김초엽은 정상성의 규범을 깨나가는 용기를 마주하면서 성장한다.

말하는 몸 1, 2

박선영·유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각 권 1만6천원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인권운동가, 성매매 경험 당사자 봄날, 삼성 LCD 공장 산업재해 피해자 한혜경 등 88명은 동명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했다. 백세희 작가는 우울증의 기억을, 정혜윤 피디는 다른 사람이 배려해준 덕에 유지하는 채식 등을 이야기한다.

어름치

박세가 글·그림, 송송책방 펴냄, 1만7천원

어름치란 천연기념물로 보호어종이다. 주인공 화성은 강원도 한 카페의 어름치 타일 그림 팀에 합류한다. 타일 그림 작업에 모인 팀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무규칙 건설노동자들이다. 티브이 오락프로그램처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남성들은 단조로운 가운데 재미(주로 술이지만)를 찾는다.

리얼리티 버블

지야 통 지음, 장호연 옮김, 코쿤북스 펴냄, 1만7600원

플라스틱 쓰레기 재앙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석유의 5%만이 플라스틱이 된 것이다. 화석연료를 태워서 나오는 매년 410억t의 이산화탄소는 보이지 않기에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은 미생물, 동물의 실체도 보지 않고 있다. 저자는 버블로 감춰진 실체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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