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역사 속 공간] 조선 왕 넷 배출한 천하명당은 어디?

태종이 살며 세종·문종·세조 태어난 ‘준수방 잠저’
서울 통인동 일대 추정… “본채는 통인시장 쪽일 것”
등록 2021-01-25 14:10 수정 2021-01-29 08:42
태종과 세종, 문종, 세조 등 4명의 왕을 배출한 집터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일대로 추정된다. 유력한 후보지인 통인시장(아래 긴 지붕)과 22경찰경호대(오른쪽 아래 울타리 안) 일대의 모습. 김규원 기자.

태종과 세종, 문종, 세조 등 4명의 왕을 배출한 집터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일대로 추정된다. 유력한 후보지인 통인시장(아래 긴 지붕)과 22경찰경호대(오른쪽 아래 울타리 안) 일대의 모습. 김규원 기자.


세종이 태조 6년(1397년) 4월10일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태어났다.(<세종실록> 총서)
태종이 ‘장의동 본궁’에 가서 건축하는 것을 두루 살펴봤다.(<태종실록> 1407년 8월16일)
태종이 ‘영견방 본궁’을 수리하도록 지시했다.(<태종실록> 1411년 7월3일)

한양 천도 직후 이방원이 살기 시작

세종 이도는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방원은 왕이 아니었고, 이도도 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방원 집에서는 모두 4명의 왕이 나왔다. 세종뿐 아니라 문종 이향, 세조 이유도 여기서 태어났다. 한 사저에서 왕이 4명 나온 것은 조선을 통틀어 전무후무하다.

이방원이 준수방 잠저에 자리잡은 것은 1395년 말로 추정된다. 그때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준수방에 자리잡은 이유는 단순하다. 정궁인 경복궁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방원의 형 정종 이방과의 사저는 사직동, 배다른 동생 이방번의 집은 옥류동, 이방원의 손자 안평대군과 아들 효령대군의 집은 수성동에 있었다. 조선 초기 서촌은 왕가 전용 주거지였다.

이방원의 준수방 잠저 살이는 길지 않았다.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거쳐 즉위한 형 정종이 1399년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왕이 돼 1405년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도, 창덕궁과 함께 이 집을 계속 썼다.

이방원은 1408년 이 집의 서쪽에 연못을 파고 한가운데 누각을 지었다. 이 누각에서 상왕인 형 정종과 자주 술잔치를 벌였다. 음악을 듣거나 타구(폴로)를 구경했고, 심지어 술에 취해 정종과 신하들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세종은 1397년 이 집에서 태어나 1399년까지 살았다. 1405년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뒤엔 부모와 함께 창덕궁에 살았다. 어렸기 때문이다. 1408년 혼인하고 1412년 대군에 임명됐는데, 아마 그 뒤 다시 이 집에 돌아온 것 같다. 문종 이향이 이 집에서 태어난 것이 1414년 10월이니 최소한 그 전엔 돌아왔을 것이다.

이 집은 세종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1418년 8월 경복궁에서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한 달 넘게 이 집에서 업무를 봤다. 아버지(상왕) 이방원이 머물던 창덕궁에 아직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종에게 준수방 잠저는 ‘엄마 같은 집’이었다. 1425년 7월 전국에 심한 가뭄이 들자 “커다란 집(창덕궁)에 편히 있을 수 없고, 본궁(사저)으로 피해 있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결국 다음달 어느 저녁에 세종은 세자와 함께 서문(영추문)을 나서 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병이 들어 액막이 차원에서 간 것이다. 세종은 1431년 8월에도 병이 들자 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방원의 집터로 추정되는 통인동 일대.(노란색)

이방원의 집터로 추정되는 통인동 일대.(노란색)

세종이 병들면 찾던 사저

준수방 잠저와 관련한 문종과 세조의 기록은 ‘태어난 것’뿐이다. 여기서 태어난 뒤 아버지 세종이 1418년 왕이 돼 창덕궁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문종은 “1414년 10월3일 한양의 사저(잠저)에서 태어났다”고 실록에 적혀 있다. 세조도 “1417년 둘째 아들로 본궁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집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먼저 준수방 잠저와 장의동 본궁(잠저), 영견방 본궁이 과연 같은 집인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지도를 보면, 준수방은 백운동천 서쪽 통인동에 있고, 장의동(장동)은 백운동천 동쪽 효자동에 있다. 또 준수방과 장의동은 한성 북부였으나, 영견방은 서부였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준수방 위치는 논란이 없다. 다만 장의동은 넓은 영역과 좁은 영역이 있는데, 이방원 집은 준수방과 넓은 영역의 장의동이 겹치는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래된 서울>의 김창희 작가(전 언론인)는 “이방원 집이 규모가 커서 북부 준수방과 서부 영견방에 걸쳐 있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방원 사저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도 오랜 논란거리다. 현재 서울시에서 설치한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은 통인동 커피공방 부근에 있다. 여기서부터 참여연대 일대까지가 세종 탄생지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통인동 커피공방은 백운동천 바로 옆으로, 왕족의 집이 들어서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태종·세종·문종·세조, 네 명의 왕이 살았거나 태어난 태종 이방원의 집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진수 선임기자

태종·세종·문종·세조, 네 명의 왕이 살았거나 태어난 태종 이방원의 집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진수 선임기자

세종 이후 왕가 기관들 자리잡아

이익주 교수는 “이방원 집은 통인동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통인동의 대부분 지역(1만3천여 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이방원은 집터 규모에 제한받지 않았고 상당한 수의 사병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면적도 7천 평 정도였다.

이방원의 사저는 세종 말기부터 버려지기 시작했다. 실록을 보면, 1433년 7월 세종은 “태종 잠저의 옛터가 풀밭이 됐다”고 말했다. 그 뒤 실록과 <한경지략>을 보면 준수방에 내시부(내시를 관할하던 관아), 사포서(궁중의 밭과 채소 등을 맡은 관아), 내섬시(궁에 올리는 토산물, 벼슬아치에게 주던 술, 일본인·여진인에게 주던 음식·옷감 등을 맡은 관아) 등 왕가의 기관들이 들어섰다고 나온다. 왕가의 터를 민간에 넘기지 않는 관행에 비춰보면 이들 기관이 이방원의 집터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현재는 이 기관들의 위치도 알 수 없다. 다만 통인시장 북쪽으로 22경찰경호대가 들어섰고, 이 일대가 일제강점기 때 지도에도 큰 필지였다. 혹시 이곳이 아니었을까? 김창희 작가는 “통인동 전체가 이방원의 집터였더라도 본채는 통인동 남쪽 참여연대 부근보다는 북쪽 통인시장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쪽이 물(옥류동천)을 앞에 두고 언덕에 기대는 전통적인 집터 자리”라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박희용·이익주, ‘조선 초기 경복궁 서쪽 지역의 장소성과 세종 탄생지’, 2012
최종현·김창희, <오래된 서울>, 동하, 2013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