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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선생님의 교과서 없는 수업 모험기

국어 선생님의 교과서 없는 수업 모험기 <우리들의 문학 시간>
등록 2021-01-09 14:56 수정 2021-01-11 01:41

“야심차게 시작한 <코스모스> 수업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시작했는데 내 수업이야말로 광막한 수준이었다. (…) 아이들의 반응은 매번 너무나 솔직했고, 내가 모르는 지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잘 몰라서.”

과학고 학생들에게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1980)의 독서토론을 지도하던 교사의 고백이 재미있다. 그럴 만한 게, 이 교사의 담당 과목은 천체물리학이 아닌 국어다. <우리들의 문학 시간>(하고운 지음, 롤러코스터 펴냄)은 지은이가 1학년 1학기부터 3학년 2학기까지 3년 내내 담임을 맡은 학생들과 진행한 ‘문학 수업’을 기록한 책이다.

<코스모스>는 천체물리학뿐 아니라 생물학과 진화론, 상대성이론, 과학사, 외계 생명체와의 교신 가능성까지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려간 고전이다. 뛰어난 과학 대중서이지만 독서토론으로 가르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다행히 나보다 과학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훨씬 많은 아이들은 <코스모스>를 좀더 다채롭게 읽어나갔다. (…) 글쓰기 과제를 받고 아이들은 또다시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은이의 말처럼 ‘교사와 학생들의 생생한 성장담’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지은이는 상대적으로 국어의 입시 비중이 높지 않은 과학고에서 ‘교과서 없는 수업’을 해보기로 하고, 아이들과 함께 문학의 세계 탐험에 뛰어들었다. 시와 친해지기로 시작해, 소설로 깊어지는 우리, 어떤 지적 모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문학사의 영토, 더 넓은 세상 속으로까지, 6학기 수업 진행은 그대로 책의 짜임새가 됐다. 책 대화 모둠 활동을 “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고, 새로운 해석에 흥미로워했다”.

지은이와 아이들이 3년 동안 독파한 인문·교양 콘텐츠 목록은 윤동주, 백석, 만해와 육사, 조세희, 무라카미 하루키, 한강, 신경숙, 장강명, 권여선, 김수영, 박완서, 김숨, 알베르 카뮈, 서머싯 몸, 사뮈엘 베케트 등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방대하다. 수업 분야도 연애소설, 저항문학, 구술 기록, 영화 감상, 라디오 드라마, 세계 고전 등 다채롭다.

지은이가 생각한 수업 목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다. 교육의 본질 같은 게 대학 입시 부담이 덜한 곳에서야 가능한 현실은 역설적이다.

6학기 전체 수업계획서가 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데, 이를 따로 분리해 볼 수 있게 한 것도 유용하다. 아이들이 지적으로 성장하고 사유가 깊어지는 과정을 기록한 ‘항행일지’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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