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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빚은 전통주로 ‘홈술’ 하실래요?

경복궁쌀로 빚은 막걸리, 충주 사과로 만든 애플사이더 주조 뒷이야기
등록 2021-01-09 14:28 수정 2021-01-11 07:19
2020년 12월 서울 성수동 한강주조 사무실에서 만난 고성용 대표. 한강주조는 경복궁쌀로 만든 막걸리로 유명하다. 류우종 기자

2020년 12월 서울 성수동 한강주조 사무실에서 만난 고성용 대표. 한강주조는 경복궁쌀로 만든 막걸리로 유명하다. 류우종 기자

청년과 전통주. 얼핏 보면 안 어울리는 단어 같다. 안 어울리는 두 단어를 새롭게 엮어가는 양조인들이 있다. 막걸리를 만드는 한강주조와 애플사이더를 만드는 댄싱사이더 컴퍼니다. 막걸리와 애플사이더. 전혀 다른 술을 만드는 양조장 같지만, 두 업체는 공통점이 많다. △20~30대 청년들이 창업한 양조장이라는 점 △서울에서 나는 ‘경복궁쌀’과 충북 충주 사과를 활용해 지역특산주를 제조한다는 점 △창업 이전에 양조 경력이 없었다는 점 △별도의 유통망을 만들지 않고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홍보해 온라인 판매로 활로를 개척했다는 점 △제품 디자인이 감각적이라는 점 등.

이들이 만드는 지역특산주는 농민이나 농업회사법인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쌀이나 사과 등)을 주원료로 제조한 술을 일컫는다. 이 지역특산주는 술을 좋아하거나 힙(hip)한 젊은이들이 일부러 찾아 마시는 술이 됐다. 2020년 12월 서울 성수동 한강주조 사무실에서 고성용(38) 대표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댄싱사이더 컴퍼니의 구성모(29) 이사를 각각 만나 ‘힙한 전통주’가 된 비결을 물었다.

와인이나 수제맥주보다 싸고 맛있는 막걸리

한강주조는 30대 청년들이 서울 쌀인 ‘경복궁쌀’로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다. 5년간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다가 성수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고성용 한강주조 대표와 건축업계에 종사했던 이상욱(38) 이사는 친구 사이다. 이들은 “우린 왜 매일 소주만 마셔야 할까”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술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종류의 술 가운데 왜 하필 막걸리였을까. “당시 이미 크래프트비어(수제맥주)가 정점을 찍고 내려갈 때였어요. 맥주는 국내 대기업도 있는데다, 외국 양조장마저 국내에 들어오면 맥을 못 출 수 있죠. 하지만 전통주는 대기업도 없고, 우리나라 술이니 외국 기업과 경쟁할 일도 없잖아요. 막걸리는 친숙한 술이기도 하고요.” 고성용 대표는 “막걸리가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고 대표와 이 이사는 전통주 아카데미인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술 빚는 과정을 배웠다. 양조장이 서울에 있는 만큼, 서울을 대표하는 술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고 대표는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지역인 서울을 대표하는 술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찾은 재료가 경복궁쌀이다. 경복궁쌀은 서울 강서구 일대의 논에서 생산된다. 이 쌀로 막걸리를 빚었고, 지역특산주 면허를 받았다.

대부분의 막걸리엔 쓴맛은 줄이고 단맛을 내기 위해 아스파르템(아스파탐) 같은 감미료가 들어 있다. 그러나 한강주조 막걸리엔 감미료를 넣지 않았다. 대신 쌀의 비율을 높였다. “술을 몇 번 담그느냐에 따라 단양주, 이양주, 삼양주라고 불러요. 나루생막걸리는 고두밥으로 밑술을 하고, 다시 고두밥으로 두 번 덧술 하는 삼양주예요. 단맛을 내기 위해 열흘 안에 발효를 끝내요.” 고 대표는 6도와 11.5도 막걸리 두 종류를 만들었다. 2019년 6월 ‘나루생막걸리’가 출시됐다.

홍보는 SNS로 충분했다. 서울에 양조장을 만드는 과정부터, 농민과 쌀을 수확하는 모습 등 제품 완성 과정을 모두 보여줬다. 직접 디자인한 로고와 예쁜 디자인의 막걸리병도 눈길을 끌었다. 2020년 3월에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이용해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코로나19가 확산돼 집에서 술을 마시는 ‘홈술족’이 늘어나자, 온라인 판매량도 많이 증가했다. 게다가 11월에 소상공인의 성장 과정을 담은 네이버의 TV광고 주인공으로도 출연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현재 양조장 설비로는 최대 한 달에 2만 병을 생산할 수 있는데, 최근엔 이조차 모자라서 팔 수 없을 정도다. “막걸리에 익숙한 어르신들은 다른 막걸리와 비교해 ‘왜 이렇게 비싸냐’며 다시 찾지 않으세요. 하지만 젊은층은 와인이나 수제맥주보다 값이 저렴하고 맛있다고 평가해줘요. 결국 맛과 품질은 통한다고 생각해요.” 고 대표가 생각하는 인기 비결이다.

충주 사과로 ‘애플사이더’를 만드는 댄싱사이더 컴퍼니의 구성모 이사(왼쪽)와 이대로 대표. 댄싱사이더 제공

충주 사과로 ‘애플사이더’를 만드는 댄싱사이더 컴퍼니의 구성모 이사(왼쪽)와 이대로 대표. 댄싱사이더 제공

청년들은 왜 소규모 양조장 창업에 나섰을까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는 파전 말고 뭐가 있을까. “막걸리는 계절마다, 보관 온도마다 맛이 달라요. 와인이 포도를 수확한 해마다 맛이 다르듯이, 막걸리도 그런 차이를 즐겁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나루생막걸리 6도는 부드러운 목넘김이 특징이라 매운 음식과 잘 어울리고, 11.5도는 끈적한 음식과 잘 어울려요. 족발이나 보쌈 같은 육류도 좋고요.” 고 대표는 막걸리를 다양한 음식과 먹어보기를 권했다.

한강주조가 ‘숙취가 심하다’ ‘고루하다’는 막걸리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댄싱사이더 컴퍼니는 이름조차 생소한 ‘애플사이더’란 존재를 각인하는 게 과제였다. 한국에서 탄산음료를 대표하는 ‘사이다’는 본디 사과즙을 발효해 만든 발포주를 말한다. 프랑스에선 시드르(cidre), 스페인에선 시드라(sidra)라고 한다. 구성모 이사는 창업하기 전에 다니던 홍보회사에서 식음료(F&B) 회사와 일하면서 “온라인 유통, 혼술 등이 떠오를 것이고, 싸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보다 비싸더라도 맛있는 술을 찾는 소비자가 늘 것”이라고 확신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구 이사와 이대로(32) 댄싱사이더 컴퍼니 대표는 대학 때 즐겨 마시던 사이다를 한국식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만 탄산음료와 구별하기 위해 ‘애플사이더’로 이름을 정했다. 미국 보스턴의 ‘다운이스트 사이더 하우스’의 양조사 6명을 한국에 데려와 기술도 배웠다. “미국과 한국의 사과 맛이 다르기 때문에 레시피를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레시피 개발 기술을 배웠죠. 한국 사과는 당도가 높고 산도나 탄닌 농도는 낮은 편이에요.” 구 이사는 “여러 사과 종류를 섞지 않고 품질이 뛰어난 충주 사과만 쓴다”고 설명했다.

2018년 9월, 두 사람은 사과로 유명한 충주에 양조장을 차렸다. “사과가 유명한 경북 지역과 충주 중에 고민하다가,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충주에 자리잡았죠. 2019년 88t, 2020년 156t의 충주 사과를 사들여 술을 빚었어요. 지역 농민과 상생을 이룬 셈이에요.”

2019년 4월 ‘스윗마마’(5.5도)와 ‘댄싱파파’(7도), 두 종의 애플사이더가 출시됐다. 지역특산주 면허를 받아 그해 여름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최근엔 풋사과로 만든 ‘그린치’ 등 세 종류의 술이 추가됐다.

지역특산주는 온라인 판매도 가능해

제품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적인 요소를 많이 녹였어요. 병뚜껑엔 창호지를 그려넣었고, 병 디자인은 호랑이·닭·원숭이 등으로 캐릭터화했어요. ‘마마 꼬’(닭)는 하이힐을 신고 유기농 귀리를 한가득 들고 퇴근하는 스윗마마, ‘미스터 호’(호랑이)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칼퇴근’한 뒤 아이들과 춤추며 놀아주는 댄싱파파죠. 21세기형 부모를 묘사한 거예요. 술 한 잔을 마시더라도 숨겨진 재미를 주고 싶었어요.”

지역 특산물로 술을 만드는 청년 양조인은 이들뿐이 아니다. 전남 곡성의 ‘시향가’를 이끄는 양숙희 대표는 곡성 특산물인 토란으로 막걸리를 만든다. 토란을 칩 상태로 건조해 고두밥과 함께 숙성시킨다. 김정대·김진경씨 부부는 2020년 충북 단양에 ‘도깨비 양조장’을 차리고 제천 의림지 쌀로 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다. 경기도 양평의 지역특산주인 ‘부자진’은 한국에서 허브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조부연씨와 영국에서 증류 기술을 배운 아들 조동일씨가 함께 만드는 ‘크래프트 진’이다.

이처럼 전통주 양조장이 늘어난 데는 제도 변화가 한몫했다. 그동안 맥주에만 한정됐던 소규모 주류 제조·판매 면허가 2015년 12월부터 막걸리 등 전통주까지 확대됐다. 1천~5천ℓ의 저장 용기만 구비하면, 누구나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다. 이후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파는 식당이 늘어났고, 막걸리 양조를 배우려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2017년에는 지역특산주 면허가 있으면 온라인 판매도 가능해졌다. 지역특산주를 만드는 청년 양조인이 늘어난 것도 이 시기와 맞물린다. 지역특산주는 전통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세의 50%를 감면받을 수 있다는 점도 지역특산주 업체 창업의 배경이다.

주류 시장은 줄어도 전통주 시장은 증가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국세청에 따르면, 최근 국내 주류 시장 규모는 감소 추세를 보이지만 전통주 시장은 2016년 397억원에서 2019년 531억원(출고액 기준)으로 성장했다. 지역특산주 제조 면허를 취득한 업체 수도 2016년 803개에서 2019년 1108개로 껑충 뛰었다. 2016년 292억원 규모였던 지역특산주 시장이 2019년 410억원으로 커진 이유다.

문정훈 서울대 교수(농경제사회학)는 “과거엔 판매 가치가 떨어지는 과일로 즙을 만들어 팔았지만, 최근엔 소비자가 과일즙을 찾지 않는 추세여서 과일을 활용할 방법이 술밖에 없다”며 “전통주에 대한 규제 완화와 온라인 판매 덕분에 청년들에게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다. 이 기회를 잡기 위해 귀농하는 청년들 덕분에 농민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SNS 활용과 감각적인 디자인은 청년들의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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