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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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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문학상 가작 수상작] 양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제12회 손바닥문학상 차별 주제 공모 가작 당선작
등록 2021-01-01 11:41 수정 2021-01-03 01:14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1.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찾아왔다. 무려 5일 동안 펼쳐지는 긴 연휴는 이 땅의 일천만 노동자들의 죽음 충동을 억제하는 일종의 진정제와도 같았다. 신입 콜센터 노동자 김주영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연휴 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주영의 눈가에는 피곤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손에 명절 선물 세트 하나씩을 야무지게 들고 플랫폼에 서서 전철을 기다리는 주영의 모습은 ‘양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라는 가슴 따뜻한 슬로건을 떠올리게 했다. 매일매일 한 차례 환승이 낀 출퇴근 세 시간을 빼고도 열두 시간 가까이 회사에서 헤드셋을 낀 채 낭랑한 목소리로 연신 고객님을 찾아가며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와중에도 명절만큼은 풍성하게 보내야 한다는 겨레의 미풍양속은 다행히도 주영을 비껴가지 않는 듯싶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주영이 근무하는 콜센터는 대한민국 재계 서열 10위 안을 떠나지 않는 굴지의 대기업 Z그룹 계열사, ZZ통신사가 출자한 자회사 z사가 운영하는 콜센터였다. 실상은 하청업체 취급이었으나 사람들은 으레 z사가 Z그룹 소속 계열사인 것으로 착각했다. 그런 세간의 오해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주영의 할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주영이 비정규 노동과 구직 활동으로 점철된 타의적 미취업자 생활을 청산하고 콜센터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할머니는 고작 전화나 받으라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줄 아냐며 노발대발했다. 쩔쩔매던 주영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주변에 ‘손녀가 Z그룹에 입사했다’고 사실과 다른 소문이 쫙 퍼진 다음이었다. 일가친척으로부터 축하가 쏟아지는 가운데 손사래를 치며 사실관계를 일일이 정정하고 있자니, 주영은 문득 서글퍼졌다. 아니, 내가 Z그룹 다닌다고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토록 ‘호부호형’을 갈망했던 홍길동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정체성 혼란을 가중하는 건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신입 상담사를 교육하는 강사들은 ‘제트마인드’(Z-mind)를 내세우며 ‘Z그룹 사람’의 사고방식에 대해 강의했다. 관리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역시 ‘고객을 상대하는 우리야말로 Z그룹의 얼굴이다’였다.

교육생들은 ‘Z그룹은 경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우리는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문구를 강제로 외워야 했다. 창업주 일가의 가계도를 숙지하는 것 역시 제트마인드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인 듯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보니, 무슨 사이비종교냐며 코웃음 치던 주영도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특히 Z그룹 전 사원이 목에 걸고 다닌다는 사원증을 받아들었을 땐 애사심 비슷한 것이 조금씩 생기는 것도 같았다. 하얀 바탕에 영문 이름과 사진이 심플하게 인쇄된 카드 형태의 사원증에는 구내식당을 비롯해 회사 인근 식당과 카페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식대 10만원이 충전된다고 했다.

4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처음 사원증을 목에 걸던 날, 주영은 자존심 상하게도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13명이던 동기는 어느새 5명으로 줄어 있었다. 사전처럼 두꺼운 교재 몇 권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수업과, 수업마다 따르는 시험, 교육생에게 업무 스트레스를 풀기로 작정한 듯한 강사들과의 모의 상담, 그리고 잔뜩 성난 고객들을 상대하는 실전 상담까지. 보기보다 빡빡한 교육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가 회사를 떠났다. 사원증은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었다. 첫 전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일종의 ‘성인식’을 치렀다는, 생존의 증표였다.

그러나 콜센터의 홍길동이 스스로 자기 처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급여 지급일 전날, 주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내 포털에 접속했다. 생년월일로 설정된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입력하고 경쾌하게 엔터키를 치자 예상 밖의 일곱 자리 숫자가 나타났다. 실지급액 1,460,000. 주영은 아연했다. 146만원은 수습 3개월 동안 법정 최저임금의 90%만 지급하더라도 최저임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이용한 사 쪽의 치밀한 계산하에,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에 들어가는 금액을 공제한 결과 산출된 숫자였다.

‘호부호형’이 불가능한 현실의 부당함을 깨달은 홍길동처럼, 주영은 분노했다. 아니 어떤 대기업에서 150도 안 주고 사람을 부리냐? 부릴 땐 대기업이고 돈 줄 땐 자회사냐? 150도 못 받는데 4대 보험을 18이나 떼가? 이런 미친 18 새끼들을 봤나….

2.

z사 콜센터 상담사는 크게 네 부서로 나뉜다. 일차적 안내를 맡는 일반 상담 부서, 새 가입자를 유치하는 영업 상담 부서, 기술적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하는 기술 상담 부서, 마지막으로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을 붙잡아야 하는 해지 방어 부서. z사 콜센터의 평균적인 업무 강도는 콜센터가 밀집한 G디지털단지를 통틀어 첫손에 꼽혔다.

특히 해지 방어 부서의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는 악명이 높았다. 법정 공휴일이 보장되고 타 부서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인센티브는 해지 방어 상담사들의 자살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섬뜩한 우스개가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해지 방어 부서에서 자살자가 나왔던 건 사실이지만, 상담사들에게 법정 공휴일을 보장해주게 된 건 ‘주말까지 상담사를 출근시켜가며 고객에게 서비스 해지를 해줄 이유가 없다’며 통신사들끼리 합의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입사 뒤 첫 2주 동안은 모든 입사자를 함께 교육하고, 부서를 나눈 다음 다시 2주간 맞춤 교육을 한다는 것이 z사의 상담사 육성 시스템이었다. 이는 창업주가 남긴 ‘사람은 누구나 제각기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유훈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z사를 포함한 Z그룹의 각 계열사와 자회사는 창업주가 언급한 ‘제각기 타고난 재능’을 찾기 위해 각종 인사 발령 때마다 적성검사를 실시했지만, 관습이란 으레 의미는 쉬이 증발하고 행위만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서 배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교육생들의 희망이나 적성검사 결과 따위가 아닌, 매달 집계되는 각 부서의 퇴직률이었다. 퇴직률이 가장 높은 부서 역시, 해지 방어 부서였다.

주영은 해지 방어 부서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실은 정신과를 다니고 있던 터였다. 회사는 주영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z사의 적성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정상인의 자아를 연기하는 것은, 여러 정신과를 전전하며 수없이 많은 심리검사를 거친 주영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주영이 자살자까지 나왔다는 부서를 지망할 리 없었다. 떠나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욕받이 노릇을 하는 게 자신의 적성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해지 방어 부서만 아니라면 어디든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영은 해지 방어 부서에 배치됐다.

3.

사막에서도 인간은 살아남고, 누군가는 선인장으로 김치를 담근다. 입사 뒤 1년 내 퇴직률이 60%를 가뿐하게 넘어가는 해지 방어 부서에서도 장기 근속자가 나오는 걸 보면 분명 그러했다. 하지만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이 지옥이 사람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해지 방어 1팀에 배치된 주영의 사정도 그랬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어떻게든 1년만 버티고 경력 만들어서 다른 데로 이직하리라고 굳게 다짐했지만 실상은 버틴다는 표현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닭장같이 빽빽하게 칸막이가 들어찬 콜센터 사무실은 작은 감시 사회였다. 일반적인 콜센터 상담사의 가장 큰 족쇄는 ‘시간당 콜 수’다. 상담사가 얼마나 많은 전화를 받는지가 기본적인 성과를 결정하는데, 보통 하루 8시간 전화받는다고 치면 70~80콜 정도를 받아야 ‘한 사람 몫’을 한다고 여긴다. 관리자는 시시각각 전화 응대 현황을 감시하며, 전화받지 않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후처리(고객과 통화 종료 뒤 전산 처리 등을 하는 시간)를 풀라”고 닦달한다. 전화받는 시간이 길어져도 여지없이 불벼락이 떨어진다. 관리자의 승인 없이 자리를 비우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화장실도 메신저 대화창에 보고한 뒤 관리자의 허락이 떨어져야 갈 수 있는 곳이 콜센터였다.

해지 방어 부서는 감시 형태가 조금 달랐다. 할당된 콜 수가 하루에 40콜 정도로 줄어드는 대신, ‘해지율’이라는 족쇄가 구성원을 옥죄었다. 해지 방어 부서 팀장들은 “후처리를 풀라”는 말과 함께 “해지율 관리해라” “너희들 해지하러 출근하냐” 등 시시각각 큰소리를 내지르며 채찍질을 해댔다.

해지율을 산정하는 기준도 상담사들에게 불리했다. 첫 번째 통화에서 고객의 해지를 막더라도 그 고객이 한 달 이내에 다시 전화를 걸어 해지한다면, 처음 전화받은 상담사와 나중에 전화받은 상담사 모두 해지율에 반영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지를 안 해주면 ‘과다 방어’ ‘밀어내기’라며 인센티브를 차감하곤 했다. 이런 페널티 작업은 관리자들의 무작위 검수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신고로 이루어졌다. 이전 상담사의 ‘밀어내기’로 해지율에 피해를 본 상담사가 이를 갈며 이전 상담사를 신고하는 행위도 자주 보이는 풍경이었다.

팀장이 처음으로 해지율을 지적하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을 때, 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지네가 안 쓴다는데 그게 왜 내 책임이야. 주영의 생각으로는 애초에 ‘해지율’이라는 실적 기준 자체가 이상했다. 서비스 해지의 책임을 그저 걸려온 전화를 받을 뿐인 말단 상담사에게 돌린다는 것부터가 불합리한 일이었다. 업무 종료 뒤, 주영은 고객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한 ‘우수 콜’을 들으며 A4용지에 그 내용을 손으로 받아적어 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일명 ‘깜지’였다.

4.

“언니, 어제 깜지 했어요?”

“어. 손목 나갈 것 같아. 마우스 잡는데 막 손이 떨려.”

“괜찮아요? 나도 그제 깜지 했다가 개고생했는데. 손목보호대 한번 써봐요. 훨씬 나아요.”

오른쪽 손목을 연신 어루만지던 주영에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윤지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포니테일(긴 머리를 위쪽에서 묶어 머리끝을 망아지 꼬리처럼 늘어뜨리는 것)이 인상적인 윤지는 최종 입사자 5명 중 주영과 함께 해지 방어 부서에 배치된 유일한 동기였다. 여자상업고등학교 재학 중 현장 실습생 신분으로 처음 콜센터에 발을 들였지만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다 결국 연어처럼 콜센터로 돌아온 경우였다. 주영은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이십 대 초반에 콜센터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는 윤지가 안쓰러웠고, 윤지는 윤지대로 적잖은 나이에 신입이라고 좌충우돌하는 주영이 안타까웠다. 서른과 스물둘. 나이차가 적지 않았지만 콜센터라는 전장, 해지 방어 부서라는 격전지에서 전우애를 다지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들 잠깐 일어나서 모인다.”

아침 조회를 알리는 팀장의 부름에 주영과 윤지는 대화를 멈추고 팀장 쪽을 향해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두 사람과 등을 맞댄 자리에서 일하는 두 동료, 문선우와 진계영도 잡담을 멈추고 같은 자세를 취했다. 팀장은 30대 후반의,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사람 간의 예의를 중시하는 타입이라고 자처했는데, 그 예의는 상명하복을 뜻했기 때문에 팀원들은 ‘그 나이 처먹고 아직도 군대 물이 덜 빠졌다’며 뒷담화를 하곤 했다. 팀장이 입만 겨우 가린 마스크 안으로 헛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우리 해지 방어 팀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해지율입니다.”

“그런데 해지율만 관리하면 돼, 안 돼?”

“안 됩니다.”

“내가 우리 신입 상담 팀도 이제 슬슬 영업 실적 올려줘야 한다고 말했냐, 안 했냐?”

“했습니다.”

“특히 주영이, 아직도 재약정이랑 신규 건이 하나도 없다. 다른 동기들 보고 느끼는 거 없나.”

“죄송합니다.”

주영이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 세 사람도 어깨를 움츠렸다. 새로운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 실적 압박이 가장 심한 곳은 역시 영업 상담 부서였지만, 그에 다음가는 곳이 해지 방어 부서였다. 약정 기간 만료를 앞두고 재약정을 문의하려는 고객의 전화 또한 걸려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영업하자니 전화받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렇다고 전화를 많이 받자니 영업이 여의치 않았다. 해지 방어 부서의 고충은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딜레마에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추석이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추석 프로모션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번에 재약정 한 건, 신규 상품 판매 한 건 해서 총 두 건. 선착순 1명한테 추석 선물 세트! 그리고 신규 상품 판매 한 건당 추가 선물 세트! 원래 선배 상담사들한테만 스팸 주기로 했는데, 내가 우리 신입들도 할 수 있다고 빡빡 우겨서 받아왔다. 다들 빨리 달성해서 추석날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 오늘도 파이팅!”

“파이팅!”

주영, 윤지, 선우, 계영이 입 모아 외쳤다.

5.

“아니, 다른 데선 그냥 주는 걸 가지고 경쟁을 시켜요?”

“내 말이….”

밥을 뜨다 말고 선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구내식당의 투명 칸막이 너머로 선우와 마주 보고 앉은 계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와 계영은 서로 동기로, 주영과 윤지의 선배들이었다. 선배라고 해도 입사 일자가 2주 정도 차이 날 뿐으로 같은 신입 상담사였다. 양 볼이 볼록해진 채 음식을 씹던 윤지도 칸막이 너머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뭘 좋은 거 주기나 하면 몰라. 겨우 스팸 주면서….”

주영은 스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설날에 엄마가 직장에서 받아온 스팸 세트도 아직 몇 캔이 남아 찬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고작 스팸 세트 하나 주면서 실적을 요구하는 회사의 태도도 많이 고까웠다.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건, 아직도 제대로 된 실적 하나 올리지 못한 자신의 처지였다. 팀장은 주영을 붙잡고 ‘목숨 걸고 한번 팔아봐라’고 열을 올리곤 했지만, 목숨을 건다고 영업이 되던가. 애초에 사람 목숨이란 게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영은 생각했다.

“그래도 명절에 빈손으로 들어가긴 좀 그렇잖아요.”

승부욕 강한 윤지가 눈을 빛냈다.

6.

G디지털단지에 콜센터 이상으로 많은 것이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이었다. 그중에서도 2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1ℓ들이 페트컵에 담아 파는 가게 앞에는 매일 아침과 점심, 그리고 야근을 앞둔 저녁 식사 시간마다 길게 줄이 늘어섰다.

19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어가며 미싱을 돌렸듯, G단지 노동자들도 매일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전화를 받았다. G단지 사람들은 ‘사람 인’이 아니라 ‘카페 인’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z사 상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콜은 카페인이 받고, 오후 콜은 당이 받는다며 직원당 하루 평균 한 개 이상의 페트컵을 책상에 쌓아놓곤 했다.

주영은 한숨을 쉬며 1ℓ들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오전 마지막 콜이 길어져 점심시간 4분의 1을 날려버린 직후, 10분 만에 밥을 들이마시고 사옥 옆 카페로 달려가 다시 15분간 줄을 선 끝에 산 귀중한 커피였다. 주영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 하단 작업표시줄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53분. 점심시간 종료까지는 7분이 남아 있었다. 58분에는 자리에 앉아서 전산(업무 소프트웨어)에 로그인을 해야 했기에 실제 남은 시간은 5분 남짓인 셈이었다.

화장실을 갈까 말까. 주영은 잠시 고민한 끝에 1시간쯤 콜을 받고 난 다음인 2시 전후에 10분간의 휴식 기회를 사용해 화장실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길지도 않은, 그리고 제대로 보장받지도 못하는 귀중한 점심시간을 생리현상 해결에 쓴다는 게 너무나도 아까웠다.

“로그인 합니다!”

팀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잠시 화장실 다녀올까 말까 고민했을 뿐인데 벌써 5분이 지났다. 주영은 회사에서 지급하는 불편하고 납작한 키보드를 대신해 직접 장만한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며 전산에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헤드셋을 착용했다. 왼쪽 귀를 덮은 헤드셋 스펀지를 타고 경쾌한 삐- 소리가 울려퍼졌다.

7.

“고객님, 저희 상품 오랫동안 사용해주신 우수 고객님이셔서 TV 기본료 3천원을 6개월 동안 할인해드리고요. 다시보기 쿠폰 1만5천원도 받아보실 수 있으세요.”

“아니, A사에선 다시보기 쿠폰 3만원을 주던데 Z사는 왜 1만5천원만 주는가?”

“고객님, TV 기본료 3천원을 6개월 동안 할인받으시는 거니까, 1만5천원에 1만8천원 더해서 총 3만3천원을 받으시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A사보다 3천원이 이득이신 거잖아요.”

“아니, 할인 필요 없고 다시보기 쿠폰으로 줘요.”

“네?”

“다시보기 쿠폰으로 달라고요. 할인 필요 없어.”

“고객님, 그거는 저희 정책상 어려우시고요. 매달 통신비 부담스러우시잖아요. 3천원씩 추가로 할인되는 금액이 적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6개월이 쌓이면 꽤 큰 금액이거든요. …어차피 A사보다 3천원 더 받으시는 거니까 고객님께서 훨씬 이득 보시는 거세요.”

“아니, 나는 할인이 필요 없고 다시보기 쿠폰으로 달라고. A사는 다시보기 쿠폰 3만원을 줬단 말이야.”

주영은 헤드셋의 음소거 키를 누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씨발, 그럼 A사로 옮기든가. 존나 진상 각이네. 쌍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간혹 음소거 키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욕설은 절대 금물이었다. ‘친절 상담 부탁드린다’며 다른 상담사가 그룹 통화로 연결했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던 고객이다. 아니 해지 방어하라고 넘기는 거면서, 친절 상담은 얼어죽을.

헤드셋 너머 고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충남 모처에 거주하는 6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그는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주영은 화면에 뜬 고객 정보를 훑으며 고객님, 많이 답답하셨죠?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라며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로 공감하다가, 좀더 빠른 상품을 이용할 것을 권유하다가, 잘 먹히지 않자 기십만원의 위약금으로 협박하는 등 갖은 수를 동원해 고객을 구슬리려 애썼다.

만만찮은 위약금 액수에 고객은 내가 Z사 상품을 얼마나 오래 썼는데 왜 이렇게 위약금이 비싸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영은 ‘그러게요, 왜 그렇게 비쌀까요’라며 맞장구를 치고 싶었지만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고객님, 원래 약정 기간 3년을 이용해주시기로 하고 저희가 상품을 많이 할인해드린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할인해드린 금액이 차곡차곡 쌓인 개념이 위약금이세요. 그러니까 저희가 할인을 많이 해드렸기 때문에 위약금이 그렇게 높으시다고 느끼실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고객을 높이는 건지, 위약금을 높이는 건지 알 수 없는 주영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던 고객이 그래? 내가 그렇게 할인을 많이 받았어? 하고 반문했다. 다행히 위약금의 액수에 압도됐는지, 고객의 해지 의사는 한풀 꺾인 것 같았다. 이제 할인으로 끝내면 된다. 주영이 쥔 몇 안 되는 카드 중 한 장이, 바로 몇 푼 안 되는 할인 혜택이었다.

“아가씨, 내가 몇 번이나 말하느냐고. 나는 할인이 필요 없어. 높은 사람 바꿔봐. 나는 다시보기 쿠폰 3만원이 필요하다고.”

“고객님, 정말 죄송한데 저희 정책상 다시보기 쿠폰 3만원까지는 제공이 어려우시고요. 대신 3천원 6개월 할인 혜택 받아보시고, 다시보기 쿠폰 1만5천원 잘 이용해주시면….”

“아니~ 안 되는 게 어딨어. 일단 높은 사람 바꿔봐. A사에서는 3만원을 준다니까?”

“고객님, 상위자랑 통화를 하시더라도 이 부분 도움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3만3천원 잘 이용해주시면 안 될까요?”

통화 시간은 벌써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주영아, 뭔데 콜을 그렇게 길게 받아? 팀장의 목소리였다. 등줄기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주영은 의자를 팀장 쪽으로 돌려 양팔로 X자를 그려 보이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헤드셋 너머로 거참 말귀 못 알아먹네, 높은 사람 바꾸라고! 하는 고성이 들려왔다.

“고객님, 그럼 제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어느 시간대가 괜찮으세요?”

8.

“주영아, 진짜 답답하네. 장콜(긴 콜)이 될 것도 아닌데 고객 말을 다 들어주고 있으면 어떡해. 그럴 땐 그냥 ‘고객아, 우리가 좋은 서비스로 보답할게’ 하고 끝을 내야지.”

“넵, 명심하겠습니다.”

“알면 됐고. 주영이 마수(맨 처음으로 물건 파는 일)해야지. 빨리 OB(Outbound·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것) 나가서 해치우고 남은 시간 얼른 콜 받아라. 오늘 콜 밀린다.”

“넵.”

주영이 결국 메신저 대화창에 ‘우리 다시보기 쿠폰 3만원은 못 주는 거죠?’ 하고 입력하자, 팀장은 주영의 콜을 당겨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굳은 표정으로 팀장 앞에 선 주영은 팀장의 짜증 섞인 한마디 한마디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넵, 을 연발했다. ‘예’나 ‘네’도 아닌, ‘넵’이었다. 팀장이 때리는 것도 아니고 쌍욕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앞에만 서면 자꾸만 주눅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사실 말이 쉬워 좋은 서비스로 보답이지, 고객 전화를 감히 상담사가 먼저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시키는 대로 전화를 걸고 받으러 갈 따름이었다. 주영이 알아들은 건 ‘빨리 마수걸이 계약을 해오라’는 메시지뿐이었다.

주영은 전화기 버튼을 하나하나 꾹꾹 힘주어 눌렀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Z사 상담사입니다. 고객님, 제가 알아봤는데요. 저희가 더 도움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앞으로 저희 상품 잘 이용해주시면 더 좋은 서비스로 보답하겠습니다. 주영이 있는 죄송 없는 죄송을 다 찾으면서 다시 15분 동안 빈 뒤에야 비로소 고객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전에 남았다. 아가씨,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주영은 얼음이 녹아 농도가 연해진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번 쭉 들이켜며, 그 말이 차라리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내가 융통성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거면 좋겠다고.

9.

박윤지 - 기가상향 인티재요

진계영 - 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

문선우 - 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

김주영 - 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

팀장 - 오 우리 윤지! 오늘 벌써 두 개째!! 그러면 이제 주영이만 마수하면 되는 거임? ㅋㅋ

김주영 - 분발하겠습니다 ㅋㅋ큐ㅠ

팀장 - 추석 프로모션 : 재약정 윤지 2 선우 1 계영 1 주영 0 // 신규 없음

팀장 – 윤지 계영 선우는 신규 하나만 더 따오면 선착순 1명 선물 세트! ^^

팀장 - 선배들은 벌써 스팸 하나 타감 ㅋㅋ 우리 신입들도 할 수 있지?

진계영 - 할 수 있습니다 ㅋㅋㅋ

문선우 - 할 수 있습니당~

김주영 - 넵 할 수 있습니다

윤지의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나비가 춤추듯 움직였다. 메시지 입력창에 ‘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입력됐다. 느낌표가 두 개나 붙은 문장 뒤에 붙은 커서가 세 번째 느낌표인 양 깜박였다. 윤지가 엔터키를 누르자 입력창의 메시지는 곧바로 대화창으로 옮겨갔다. 줄임말로 이루어진 윤지의 첫 메시지를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이렇다. ‘기가상향’은 ‘기가 인터넷으로 속도 상향’, ‘인티재’는 ‘인터넷과 IPTV 재약정’이라는 뜻으로, ‘기가 인터넷으로 상품을 한 단계 올린 다음 인터넷과 IPTV 재약정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윤지는 메신저 대화창을 모니터 오른쪽 상단 구석으로 밀어놓고 다시 자판을 두드려 엑셀 시트에 숫자 몇 개를 추가했다. 벌써 다섯 번째 재약정이었다. 이러면 인센티브가 얼마더라? 건당 얼마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계산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z사의 인센티브 계산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온갖 정체불명의 변수들이 포함된 것이 z사의 콜센터 상담사 인센티브 계산식이었다. 시킬 때는 단순하게, 돈 줄 때는 복잡하게. 경영학 교과서에 적힌 첫마디가 아닐까? 고등학교 다닐 때도 유독 회계 시간에 약했던 윤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악착같이 상품을 설명하고, 재약정을 유도하고, 그리고 시트에 실적을 적어넣는 일뿐이었다.

윤지는 돈을 벌어야 했다. G단지의, 아니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출근하지만 윤지는 스스로 더욱 절박하다고 느꼈다. 윤지가 콜센터에서 받는 수입의 절반 가까운 금액은 태어나기도 전에 쌓였다는 부친의 빚을 갚는 데 고스란히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지는 지방 출신 자취생이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조선소와 횟집뿐인 고향이 싫어 서울로 올라왔지만, 콜센터 월급에서 절반을 뗀 금액만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윤지는 주말마다 월세를 벌기 위해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에 알바하러 나갔다. 윤지가 해지 방어 부서 배치를 자청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빨간 날에는 쉰다는 것. 팀장은 z사만큼 인센티브가 센 콜센터도 없다며 얼른 알바를 그만두고 콜센터 업무에 전념할 것을 권하곤 했지만, 윤지는 지금의 생활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운 좋게 대학에 진학한 극소수의 친구들은 취업이 안 된다고 늘 우는 소리를 했고, 고향에 남은 친구들은 폐쇄적인 지방의 답답함을 호소했다. 벌써 결혼과 임신의 생애주기에 들어선 친구들도 있었다. 윤지는 서울의 자유로운 공기가 좋았다. 놀 데도 많고, 술 마실 데도 많고, 네일아트숍도 많고, 영화관도 많고. 무엇보다 담배 피우는 거로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좋았다. 윤지는 서울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도 가족에게 보탬이 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번에 스팸을 타면 엄마 집에 보내야지. 윤지가 다시 ‘복귀’ 버튼을 눌렀다. 삐- 사랑을 전합니다. ZZ사입니다~.

10.

기적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 포털 국어사전에 따르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일컫는다고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적이란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법이라고. 주영에게 기적을 믿을 여유 같은 건 없었지만,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은 찾아왔다.

“사랑을 전합니다~ ZZ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영업 상담 부서 박철민 상담사입니다. 인터넷 이전 설치하면서 기가 상향 재약정 원하시고, 티브이 신규로 가입 원하시는 고객님이십니다. VIP 고객님이시니까 친절 상담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제가 이번에 이사하면서 인터넷 속도를 올리고, IPTV도 하나 하려고 하는데요.”

주영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VIP’ 세 글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거야 사탕발림이었으니까(진짜 VIP는 Z그룹 계열사 임원들이다). 핵심은, 고객이 자기 스스로 해지가 아닌 재약정을 하겠다고 먼저 굴러들어 왔다는 사실이었다. 어지간하면 영업 상담 부서에서 알아서 처리했겠지만, 재약정이 껴 있어서 해지 방어 부서까지 넘어온 모양이었다. 헤드셋 너머로 영업 부서 상담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재약정 의사를 가진 고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치열한 탐색전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부터 자기 카드를 다 내놓는 고객이 있다!? 넝쿨째 호구… 아니 호박이 굴러떨어진 셈이었다.

“네, 고객님! 고객님께서 받아보실 수 있는 혜택을 제가 한번 살펴볼 텐데요. 잠시만 기다려줄 수 있으실까요?”

“네.”

주영은 계산기를 꺼내들었다. 사람들은 키보드 버튼만 몇 개 누르면 결괏값이 쫙 출력되고, 상담사는 그 값을 대충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사람을 쓰는 값이, 만능의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값보다 훨씬 저렴할 뿐이다. 최적의 효율을 만들어준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이 지점이었다. 그 결과 재약정 고객에게 줄 수 있는 상품권 값과, 재약정시 고객에게 보장할 수 있는 월 요금의 할인값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직접 요금표를 봐가며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21세기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사람을 이기는 세상에! 인공지능이 대체할 직업 1순위로 콜센터 상담원이 꼽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지만, 현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한참 표를 들여다보고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주영은 음소거 키를 끄고 입을 열었다.

“고객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품권 25만원에, 월 요금 4만4천원에 이용 가능하세요.”

“네? 제가 지금 인터넷 얼마에 쓰고 있는지 아세요?”

“네? 고객님 잠시만요.”

주영의 가슴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요금 화면 대신 상품표만 보고 계산한 게 화근이었나? 황급히 요금창을 보니 월 1만5천원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찍혀 있었다. 주영이 말한 금액보다 훨씬 낮은 금액이었다. 어, 이게 뭐지?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송 솟아났다. 아! 결합상품 할인율을 적용하지 않아서 처음 금액이 나온 건가? 인터넷과 IPTV를 함께 이용하면 인터넷에서 일정액을 할인해주는, 결합할인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그걸 깜빡한 듯했다.

“고객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4만원에 이용 가능하세요.”

“아닌데? 그렇게 비싸요?”

“네?”

“나 조금 아까 상담사한테 3만6천 얼마로 상담받았던 것 같은데….”

“고객님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신입이라서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결합할인에, 오퍼(추가로 제공하는 혜택)까지 있었구나! 주영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기계 임대료 반값 할인 오퍼에, 기가 상향 할인 오퍼에, 해지 방어 부서 추가 오퍼까지! 표 몇 개가 빽빽하게 인쇄된 A4용지 몇 장을 바삐 뒤적이며, 주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객이 호구가 아니라 내가 등신이지. 어떻게 이게 안 보였을까. 망했다. 이번 건도 날아갔구나. 책상이 종이 더미로 어지럽게 덮였다.

“네, 고객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요금이 맞으세요. 인터넷 속도 기가 인터넷으로 상향하셔서 1만8천원, 티브이 월요금 1만6천원, 셋톱박스 임대료 반값 할인해서 2천원, 총 3만6천원 맞으세요. 부가세는 별도시고요.”

“아, 맞아요! 3만6천원에 부가세 별도!”

“네, 고객님 맞습니다… 그러면 재약정이랑 신규가입 도와드릴까요?”

“음….”

여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30분이었다. 주영은 울고 싶어졌다. 조금 전 충청도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에게 다시보기 쿠폰 3만원을 주지 못해 대역죄인이 되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슬픔이 주영을 감쌌다. 마수를 놓쳤다. 그것도 재약정 한 건에 신규 한 건, 명절 선물 세트가 걸린 추석 프로모션 조건을 단번에 충족할 수 있는 ‘대박 고객’을. 주영은 다리를 달달 떨며 아이스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빨대 끝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음료를 빨아들이는 제 기능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네, 그럼 해주세요.”

“네?”

“아, 재약정이랑 티브이 신규가입 할게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기적의 콜이었다.

11.

“이야, 선착순으로 주는 명절 선물 세트를 주영이가 가져갈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이건 김 세트. 티브이 신규 했으니까 추가로 주는 거야. 오늘 주영이 양손 무겁네. 연휴 잘 보내고.”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니 어째 계영이만 빈손이야? 윤지는 티브이 신규 팔아서 김 받아가고, 선우는 고객 만족 답장 받아서 과자 받아가고. 진계영, 똑바로 안 할래?”

팀장이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화내는 척하며 말했다.

“저도 설날에는 양손 무겁게 돌아가겠습니다.”

계영이 대답하자, 팀장이 와르르 웃었다. 다른 팀원들도 따라 웃었다. 주영은 양손에 든 선물 세트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팀장의 구박을 면하게 해준 소중한 첫 실적이었다. 집에 가서 꼭 스팸 구워 먹어야지. 주영은 다짐했다.

“그래, 오늘은 집에 일찍들 들어가자. 스케줄 빠진 거 없는지 확인하고. 그럼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팀장이 자리에 돌아가자 윤지, 선우, 계영은 목례를 한 뒤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자리로 돌아간 팀장은 다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주영은 연휴 동안 공부할 정책 자료를 가방에 챙겼다. 닷새나 쉬면 업무에 대한 감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영은 문득, 팀장이 퇴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는 주영보다 팀장은 항상 먼저 와 있었고, 주영이 잔업을 마치고 퇴근할 때도 언제나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오늘도 쉽사리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팀장의 눈 밑에 깔린 그림자가 짙었다.

12.

“이게 다 뭐야? 회사에서 준 거야? 대기업이라 그런지 역시 인심이 좋네~.”

“우리는 자회사라니깐요. 스팸이랑 김인데 다 주는 거 아니고 경쟁 붙여서 프로모션으로 받은 거예요. 내가 인터넷이랑 티브이 죽어라 팔아서 받아온 거야.”

“그러면 어떠냐. 받은 게 중요하지.”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 올라오느라 땀범벅이 된 주영에게서 선물 세트를 받아든 주영의 엄마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가벼웠기 때문이다. 요즘 스팸은 이렇게 가볍게 나오나? 양손이 자유로워진 주영은 방에 들어가 가방과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주영은 진저리를 치며 샤워기 레버를 온수 쪽으로 한껏 돌렸다. 엄마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들어왔다.

“주영아!”

“어, 왜요?”

“이거 스팸 아닌데?”

“뭐?”

주영이 맨몸으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럼 뭘 줬다는 거예요? 주영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선물 세트 꾸러미를 정리 중인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가 놀라며 주영을 향해 말했다.

“얘가 왜 이래, 물 떨어진다. 얼른 들어가!”

“스팸이 아니면 뭘 줬냐고요. 리챔이라도 줬나?”

“아니, 이거 참친데?”

“네?”

주영은 허겁지겁 달려가 풀어놓은 꾸러미를 확인했다. 과대 포장된 상자 안에 곱게 자리한 것은 분명히 스팸이 아닌, 참치캔이었다. 그것도 제일 작은 사이즈. 주영은 당황했다. 어, 나 오늘 스팸 구워 먹어야 하는데…. 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가 회사에서 받아온 스팸 있는데 그거 구워 먹어.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개새끼들아, 스팸 준다며. 약속이 다르잖아, 개새끼들아. 씨발새끼들아. 잠시 주저앉아 있던 주영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면대 근처에 놔두었던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리며 뭔가를 검색했다. ‘스팸 선물 세트 가격’ ‘참치 선물 세트 가격’…. 참치캔 세트와 햄 세트의 가격 차이는 3배에 가까웠다.

“아, 씨발!”

문 밖에서 엄마가 대답했다.

“얘가 왜 욕을 하고 그래?”

“아 스팸 준댔다고요! 근데 스팸이 아니잖아!”

“받았으면 됐지, 왜 엄마한테 짜증을 내?”

“아, 몰라요!”

주영이 문을 꽝 닫았다. 물줄기가 닿지 않는 곳에 스마트폰을 놓아둔 주영은, 다시 샤워기를 틀어 쏟아지는 물 속에 몸을 맡겼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주영의 눈에 흐르는 것이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구슬

수상소감 / 올 것이 왔구나
구슬 제공

구슬 제공

수상 소식을 들은 뒤, 직장 동료들에게 커피를 샀다. “제 소설이 공모전에 당선했어요.” “잘됐네요. 축하해요!” “관리자들에게는 비밀이에요.” “왜요?” “회사 욕이거든요.” “…잘 마실게요.” 그렇게 쓰인 글이었다.
아무튼, 눈 밝은 이들이 나의 천재성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하는 듯해 올 것이 왔구나 싶다. 비록 대상은 아니지만 상의 격이 재능의 격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쉬움은 없다. 생판 모르는 남의 글들 읽으며 심사하느라 다들 고생 많으셨다.
답답한 세상, 마스크 탓에 더욱 답답했다. 이럴 때일수록 좋아하는 것들을 꼭 붙들고 견디게 되는 것 같다. 생애 첫 소설을 완성한 직후 인터넷 어딘가에 올리려던 나를 필사적으로 말려 공모전에 응모시킨 소설가 문녹주, 시인 J, 참스승 Y를 비롯해 초고를 읽어준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초고를 50명 정도에게 보냈다.)
유명 축구 감독은 트위터를 일컬어 인생의 낭비라고 했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게 낭비의 연속인 법이다. 많은 공모전 중에서 콕 집어 손바닥문학상을 추천해준 SNS 친구들도 고맙다. 트럼프가 없어도 트위터가 망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자.
내 일방적인 흠모를 받고 계신 배우 예수정 선생님과 우리 열두제자(영화 <69세>, 연극 <화전가> 많은 관심 부탁!), 항상 크나큰 문화적 혜택을 내려주시는 대스타 이반지하님께 영광을 돌린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고양이 꾸꾸와 내가 제일 존경하는 우리 엄마에게 사랑을 전한다. 참, 콜센터의 동료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여성, 퀴어, 지방, 노동계급 등 중첩된 소수자성을 갖고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바란다. 2021년에는 약자들이 덜 고달팠으면 한다. 또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이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프로야구팀 키움 히어로즈가 창단 첫 우승을 거둔다면 정말, 좋겠다.
소설보다 수상 소감을 더 열심히 썼다. 한 분이라도 웃으셨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상금으로 꼭 스팸을 사 먹을 것이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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