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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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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일 단식투쟁으로 옥사한 청년

일제의 ‘예방구금’에 저항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혁명가 이한빈
등록 2020-12-20 11:36 수정 2020-12-21 00:13
1937년 9월29일, 32살 때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범죄자 식별용’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37년 9월29일, 32살 때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범죄자 식별용’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05일간의 단식 끝에 자기 목숨을 공동체에 바친 사람이 있다. 처절한 단식투쟁으로 철벽같이 강고한 지배체제에 맞선 사람이다. 이렇게 운을 떼면 저 유명한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1981년 보비 샌즈를 비롯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10명이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배에 맞서서 46∼73일간의 옥중 단식 끝에 사망한 사건 말이다. 온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 비극적인 사건은 지금도 단식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필자가 염두에 둔 이는 아일랜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일제강점기에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에 헌신하다가 일본 관헌의 손에 희생된 조선 청년 이한빈(李翰彬)이다.

‘재범 우려 있다’며 출감 불허

이한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사학자 박준성의 글을 통해서였다.1 박준성은 일본 경찰의 취조 기록과 제3자의 회고담을 토대로 이한빈의 기막힌 삶을 재구성했다. 박준성은 해방 뒤 처음 맞이하는 5월1일 노동절 기념식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위원장 허성택의 연설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무려 105일 동안 처절한 단식투쟁을 감행한 선진노동자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까닭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살인적인 단식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겪었을 참혹한 고통을 상상하니, 이한빈이란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이한빈은 사회주의자였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 장래가 촉망되는 간부급 인물이었다. 30살 되던 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했고, 그 뒤 국내에 잠입해 비밀결사운동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출감 예정일은 1942년 9월20일이었다.2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이 갈수록 확대되던 극단의 시기였다. 만기를 채웠는데도 이한빈은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이른바 ‘예방구금’에 걸려든 탓이었다. 예방구금이란 재범 우려가 있다는 관헌의 심증만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전력을 가진 사람을 수감하는 행정처분이었다. 아무런 범죄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터무니없는 악법이었다.

이한빈은 항의에 나섰다. 1943년 3월1일 시작된 단식은 6월13일까지 계속됐다. 단식이 길어지면 체내 근육과 지방이 신진대사의 에너지원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장기간 단식은 인간의 신체 조직을 파괴하기 마련이다. 이한빈은 피골이 상접한 채 숨을 거뒀다.

이한빈을 다시 만난 건 신문지면에서였다. 언론매체 전산화가 확충돼 예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신문기사를 쉽사리 활용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이한빈에 관한 신문기사는 주로 1926~29년 4년 동안 분포돼 있었다. 그의 나이 22~25살에 해당하는 시기다. 이한빈의 동정을 다룬 신문기사는 9편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20대 전반기 청년 이한빈이 어떤 일에 몰입했는지를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한빈은 고향인 함경남도 신흥군의 청년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8년 2월 현재 신흥군의 면단위 청년단체인 가평청년회 간부였다. 집행위원장 후보 겸 교양부 위원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위원장 주장순에 뒤이어 제2의 지위에 있었다. 군단위 연맹체인 신흥청년동맹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보기를 들면 1928년 4월 조직 변경 총회에 참석했고, 회관 건립을 위한 의연금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9월에는 군내 9개 면 지부를 훑는 순회강연단에 참여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 임충석을 포함한 9명의 연사 명단에 그의 이름도 올라 있다.3

1932년 10월 초 공산대학 입학을 위해 직접 쓴 이력서. 임경석 제공

1932년 10월 초 공산대학 입학을 위해 직접 쓴 이력서. 임경석 제공

항일운동가이자 교사이자 언론인

그는 농촌야학 활동가였다. 1926년 12월 당시 가평면에는 노동야학 14곳이 설립됐는데, 대체로 1개 리에 하나꼴이었다. 이한빈이 관계한 야학은 그중 풍상리에 있는 풍상야학당이었다. 주무와 강사를 합해 교사 3명이 있었고, 학생은 35명이었다. 이한빈은 교사였다.

이한빈은 중앙일간지 군단위 지국에 소속된 언론인이기도 했다. 1928년 11월 <조선일보> 함흥지국 풍상분국 기자가 됐다. 가평청년회 집행위원장이던 주장순과 함께 이한빈이 나란히 분국 기자에 이름을 올렸다. 현지 청년운동 지도부가 지방 언론계의 주역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한빈은 지국 기자들을 망라해 군단위 기자단을 결성하는 데도 참여했다. 1929년 12월 신흥기자단을 결성했는데 거기에는 세 중앙일간지(<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의 지국 기자 17명이 있었다.4

공통성이 엿보인다. 이한빈은 가평청년회 교양부 위원이었고, 순회강연 연사였다. 또 농촌야학 교사였고, 지국 신문기자였다. 글을 쓰고 강의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문필력이 있고 달변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중등교육까지 이수한 그의 경력과 관련지을 만하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으로 유학했다. 경성 중동학교에 진학한 때는 1923년께였다. 한창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사회주의에 사상적 감화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6년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향했다. 필시 학자금 부족이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향과 동시에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을 보면 말이다.

이한빈을 다시 만난 것은 러시아 발굴 자료를 통해서였다. 최근 수년 동안 코민테른 조선 관련 자료가 잇따라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 동국대, 외국어대, 독립기념관 등과 같은 연구기관들이 다투어 성과를 냈다. 그중에 이한빈의 신상 기록이 포함됐다. 특히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시기에 작성된 기록이 그의 개인적 풍모를 살피는 데 유용하다. 자필 이력서를 비롯해 학적부 개인카드, 추천서, 평가서, 각급 회의록 등이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보관된 이한빈 학생 개인카드. 위 가운데에 ‘1926년 고려공청에 입회했다’는 펜글씨가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보관된 이한빈 학생 개인카드. 위 가운데에 ‘1926년 고려공청에 입회했다’는 펜글씨가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자필 이력서엔 ‘이호연’

모스크바 유학생들이 통상 그러하듯이, 이한빈도 러시아식 이름이 있었다. 일찍이 일본 경찰도 취조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 일본어로 표기된 바에 따르면 ‘호엔’이었다.5 하지만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정확히 어떤 뜻으로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행히 러시아어 문서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출간된 자료집에 따르면, 이한빈이 공산대학 재학 중에 사용한 성명은 ‘Хо-Ен’이었다. <러시아문서보관소 문서번역집>에선 러시아어 소릿값을 고려해 ‘호영’이라고 옮겼다.6 음가를 잘 반영했지만, 뜻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자필 이력서는 이런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준다. 이한빈은 성명란에 ‘이호연(李浩然)’이라 쓰고 그 곁에 ‘이한빈’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이름으로 ‘호연’을 사용하겠다고 자임했던 것이다. ‘넓을 호, 그럴 연’이라는 한자어였다. <맹자>에 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 구절에서 따왔다. 정의에 기초해 형성되는 내면의 큰 기운을 뜻하는 말이므로, 그는 아마 조선혁명에 헌신하려는 결심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유학 고전에서 자신의 가명을 이끌어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한빈에겐 한학 소양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추론은 가정환경과 교육 경력에 관한 기록과도 부합한다. 공산대학 시절에 작성된 한 문서에는, 이한빈의 “아버지는 농업에 종사하며 시골에 약국을 갖고 있다. 직접 약을 제조한다”고 쓰여 있다.7 농사짓는 한편으로 한약방을 겸업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 처방이 한문으로 기록됐음을 고려하면, 그의 아버지는 한학 소양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한빈은 부모의 사회적 성분을 ‘중농’이라고 적었다. 빈농이라고 기재하는 것이 유리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가족은 농촌 사회에서 다소 유족한 생활수준을 누렸던 것 같다.

공산대학 개인카드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이한빈은 1926년부터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이다. 중동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신흥군으로 돌아간 그해였다. 공산당이나 공청과 같은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참여하는 일은 높은 수준의 각오를 요했다. 그것은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유죄판결의 대상이 됐고, 1928년 치안유지법 개정 이후로는 최대 사형과 무기징역까지 각오해야 하는 범죄로 간주됐다.

이한빈은 비밀활동 동료 가운데 특별히 한 이름을 언급했다. 그의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방치규(方致規)였다. 1902년생으로 이한빈보다 3살 많은 선배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메이지(명치)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방치규는 합법·비합법 두 영역에서 이한빈과 활동 반경을 공유했음을 본다. 1928년 이한빈이 신흥청년동맹 간부로 일할 때, 방치규는 신흥군에 잇닿은 함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했다. 두 사람은 함흥 지역 비밀결사 동료였다. 어쩌면 방치규는 공청 도위원회 간부, 이한빈은 신흥군 세포단체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죽기 사흘 전 남긴 말

이제까지 이한빈을 세 번 만났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에 대한 이해가 심화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이한빈 삶의 궤적과 내면의식을 살피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수감 중인 동료에게 남겼다는 유언이 떠오른다.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달라!”

이한빈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은 살아남은 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인 것만 같다. 다시 또 미래의 어느 굽이에선가 그의 족적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박준성, ‘이한빈,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선진노동자’,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선인, 2014.

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李翰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3. ‘加平청년회 정기총회’, <조선일보> 1928년 3월8일치. ‘신흥청맹위원회’, <조선일보> 1929년 9월14일치.

4. ‘社告’, <조선일보> 1928년 11월27일치. ‘신흥기자단 창립대회 개최’, <조선일보> 1929년 12월30일치.

5. 朝鮮軍參謀長 久納誠一, ‘朝參密第32號, 共産大學卒業者ノ軍事スパイ事件檢擧ニ關スル件’, 452쪽, 1937년 1월22일.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6. ‘A학부 제5분과(한인분과) 학생 명부’, 1932년 11월20일. 이재훈·배은경 등 옮김,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 문서 번역집>, 한울아카데미, 136~137쪽, 2020년.

7. Записка. Хо-Ен: К проток М.К. от 8.Ⅹ-32г.(이호연에 관한 메모: 1932년 10월8일치 М.К.회의록 첨부) РГАСПИ ф.495 оп.288 д.180 л.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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