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여자의 문장] 긴즈버그가 살아 있다면

‘중도 성향’ RBG가 가장 중요시한 것
등록 2020-11-07 16:07 수정 2020-11-11 23:18

아이를 낳을지 여부는 여성의 인생과 행복과 존엄이 달린 문제다. 따라서 여성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정부가 이 결정을 통제한다면, 이는 여성을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성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답변

-아이린 카먼·셔나 크니즈닉 지음, 정태영 옮김, <노터리어스 RBG>, 글항아리 펴냄, 120쪽, 2016년

2020년 9월 세상을 뜬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말년에 진보·여성 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젊은이들은 힙합 스타의 이름을 딴 ‘노터리어스 RBG’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했고, 그를 담은 굿즈와 패러디물이 넘쳐났다. 늙은 긴즈버그 대법관을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든 젊은 두 주역, 아이린 카먼과 셔나 크니즈닉의 책 <노터리어스 RBG>는 이 열광의 일단을 보여준다.

한데 책에도 나오지만 긴즈버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그를 대법관에 지명하며 말했듯, 그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 성향”이었고 한때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임신중절을 허용한 1973년 대법원 판결(로(Roe) 판결)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이 점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사회운동이 변화를 이끌기 전에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은 성급하며 역풍을 맞을 위험이 크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보수 진영이 판결을 뒤집고 임신중절을 금지하려던 1993년에도 그는 로 판결의 “무모함”을 비판했다. 오랜 동료인 페미니스트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그에게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낙태에 반대했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얼마 전 한국 정부가 내놓은 낙태죄 개정안처럼 여러 단서를 달아 천천히 ‘허용’해야 한다고 봤을까? 긴즈버그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여성권익증진단을 만들고 임신중절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 삼십 대부터 여든일곱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부인하거나 유보한 적이 없었다.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임신중절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어도 중절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냐?”라는 질문을 받고 서슴없이 “결정권은 오직 여성에게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 판결을 비판한 건, 임신중절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며 옹호한 대법원의 논리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한 여성은 임신중절을 ‘선택’하기 힘든 현실을 지적하면서, 임신중절의 권리는 개인적 선택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평등권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점진적’ 변화를 말한 것도 ‘14주 이내’ ‘성범죄로 인한 임신’ 등의 조건을 달아서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여성이 자유롭게 임신중절을 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같은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선언적 판결보다 선행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2007년 보수화된 대법원이 부분 분만식 낙태를 금지하자, 그는 대법원이 여성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론 여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소수의견에서 그는 “여성의 자기 운명에 대한 통제권”이라고 천명했다.

긴즈버그가 떠나고 한 달 뒤, 미국은 낙태에 반대하는 다국적 선언문에 서명했고, 같은 서명국 중 하나인 폴란드는 임신중지 전면 금지에 나섰으며, 한국 정부는 낙태죄 폐지를 권고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뒤집는 개악안을 내놓았다. 긴즈버그가 살아 있다면 뭐라 했을까? 끊임없는 반동의 공세에 맞서 생애 마지막까지 싸웠던 그라면, 자가 낙태의 상징인 철제 옷걸이를 들고 시위하는 폴란드 여성과 연대하며, 여성의 운명을 통제하려는 미국과 한국 정부를 향해 일갈했을 것이다. “나는 반대한다!”

김이경 작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