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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차마 적지 못했네, 죽은 아들 이야기는

베이징 망명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회고록 그리고 아들 김환기와의 서신
등록 2020-11-01 08:07 수정 2020-11-03 23:07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김창숙.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중국옷을 입고 있었다. 임경석 제공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김창숙.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중국옷을 입고 있었다. 임경석 제공

“네 아비는 병들어 죽고 말아 너의 성공을 보지 못할 것이 한스럽구나. 아아! 네 아비는 집이 있으면서도 집이 없고, 죽어도 돌아갈 곳이 없도다. 더구나 너는 아직 어려서 만리를 달려와 상면하기가 쉽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프냐. 하지만 요즘은 교통이 매우 신속해서 남한에서 북경까지 단 사흘밖에 걸리지 않으니, 네가 한번 와서 이 죽어가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으련? 너는 이 정황을 이회 숙씨 및 문중 여러 어른들께 빠짐없이 말씀드리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도록 하여라.” 1

“죽어가는 아비를 위로해주지 않으련?”

아버지 김창숙이 어린 아들 김환기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던 1923년 5월16일에 쓴 편지였다. 국외 망명길에 오른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음력 5월이므로 더위가 시작되던 때였다. 양력으로는 6월29일이었다. 그해 여름, 김창숙은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오래전부터 앓던 치질이 악화했다. 통증이 심해 걷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인용문 첫 문장에서 아비가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비관하는 마음을 토로한 까닭이 바로 여기 있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가난한 망명객 처지임에도 그랬다. 미국인 의사가 경영하는 협화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술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해 가을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간헐적인 편지 왕래가 가능했다. 망명지 베이징과 경상북도 성주군의 고향 마을 사이에 말이다. 공식 우편제도를 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경찰 수배를 받는 망명자 신분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마 인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김창숙은 1923년 4월, 5월, 8월에 각각 국내로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다. 받는 사람은 아들과 문중의 믿을 만한 친척이었다. 그 반대 통로도 열려 있었다. 김창숙은 4월과 8월에 국내에서 밀송한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의 문중 친척이 보낸 글월이었다. 4~9월 편지 다섯 통이 오간 것을 보면,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신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김환기는 15살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아버지 나이 서른에 처음 얻은 아들이었다.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김환기는 10살 이후부터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자라야 했다. 고향 마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어린 두 동생과 함께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집안의 큰일과 교육에 관한 일은 가까이 사는 의성 김씨 문중의 ‘숙씨’(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친족)들에게 물었다. 소년 김환기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본식 근대 교육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황매산에 가서 이회(而晦) 숙씨 휘하에서 일을 따르”기로 했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1113m의 고봉으로서, 남쪽 기슭 만암 마을에 이회 숙씨가 거처했다. ‘이회’란 김황(金榥)의 자(字)였다. 나라가 망하자 깊은 산골로 이사해 유학 고전 연구에만 전념하는 유학자였다. 김창숙보다 나이는 17살 아래지만 의성 김씨 문중의 항렬로는 아저씨뻘이었다. 숙씨라고 일컫는 이유였다. 김황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과 1927년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반일지사였다.

김창숙은 고향에서 온 편지를 통해 알았다. 10대 중반의 맏아들이 근대 교육을 중단하고 유학 고전 연구의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아이 교육에 관한 것이므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물며 유학자의 정체성을 가진 이로서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버지 김창숙은 답장 편지 속에 ‘과히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답했다. “네가 옛 성인의 학문에 오로지 전념하여 뛰어나게 일가견을 세워, 우리 집안을 번성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라고 의견을 써서 보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뜻을 담았다.

교육 위해 아들을 베이징으로 불러

그러나 김창숙의 속마음은 달랐다. 아들이 베이징에서 교육받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 편지에 “네가 한번 와서 이 죽어가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으려는가”라는 문장이 있다. 이와 관련되는 말이었다.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창숙은 전달에 쓴 편지에서도 “내가 죽기 전에 만나볼 수 있게 북경에 와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아마 192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맏아들 환기를 베이징으로 불러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창숙은 베이징으로 오는 절차를 세심히 일러뒀다. 교통이 매우 신속하므로 경북 성주에서 베이징까지 단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다, 김황을 비롯한 문중 어른들에게 이 정황을 말씀드려야 한다, 길을 인도해줄 성인이 있어야 하므로 동행할 만한 이에게 편지를 드려서 의논하라, 서울에 사는 지인에게 주선을 부탁해놓았으므로 서울에 도착하거든 그 사람 댁 방문을 요한다, 일정이 정해지면 속히 편지를 보내라, 떠날 채비를 서둘러라 등등 자세하게 썼다.

“지난날 내희 숙씨께서 편지를 보내셨더구나. 말씀이 몹시 도리에 어긋나 미친 사람이 실성한 것 같아, 내가 이미 공박하고 절교를 알렸단다. 너와 이회 숙씨 및 여러 종친께서도 이 뜻을 아시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대략 전한다.”

편지 속에는 또 하나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의성 김씨 문중 가운데 내희(乃希) 숙씨를 경계하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내희’라는 자(字)로 불리는, 김창숙의 가까운 친족 김한상(金漢相)이 지난 4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서 도리에 어긋난 말을 했다고 한다. 김창숙은 미친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편지 속에 무슨 말이 담겼기에 이처럼 분노했을까.

전향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했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집을 고치고 논밭을 새로 사줘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내희 숙씨는 경북 경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향을 권유하는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보냈다. 메신저 역할만 하지 않았다. 총독부 당국이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고 권면했다.2

김창숙은 큰 분노를 느꼈다. “머리털이 빳빳해지고 간담이 흔들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관한 담론을 나누고, 대소사 문중 일을 협의하던 사이 아닌가? 실망감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전향 권유가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통렬히 논박하고, 앞으로 다시는 내왕하지 않겠노라고 단언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말씀이 몹시 도리에 어긋나 미친 사람이 실성한 것 같아, 내가 이미 공박하고 절교”했노라고 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는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923년 베이징에서 김창숙이 맏아들 환기에게 보낸 비밀편지. <심산유고>(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수록.

1923년 베이징에서 김창숙이 맏아들 환기에게 보낸 비밀편지. <심산유고>(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수록.

친족의 전향 권유에 분노해 건강 잃어

심중의 고통을 이기기 어려웠던 김창숙은 술에 손댔다. 폐결핵 기운이 있어서 음주와 흡연을 삼간 지 수년이 지난 때인데도 그랬다. 가슴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 김창숙은 고량주 한 두름을 혼자 다 마시고 대취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나니 저녁 무렵이었다. 옆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미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번뇌가 생길 것 같으면 큰 잔으로 술을 퍼마시는 습관이 들었다. 묵은 병이 다시 도졌다. 금주하라고 권하는 이가 있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거듭된 폭음의 뒤끝은 건강 상실이었다. 만성 치질이 급격히 나빠졌다.

마침내 큰아들 환기가 베이징으로 건너왔다. 1925년 봄이었다. 베이징행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지 1년10개월이나 됐을 때다. 환기는 벌써 17살이 되었다. 7년 만에 이뤄진 부자 상봉이었다. 김창숙은 아들이 근대 교육의 길로 나아가게끔 인도했다. 먼저 두 개의 언어를 배우게 했다. 중국어와 영어다. 베이징에서 학업을 쌓으려면 마땅히 중국어를 익혀야 하는데, 영어 공부를 시킨 점이 이채롭다. 망명지에서 겪고 목격한 국제적 감각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이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똑똑히 지켜본 결과였으리라.

김창숙은 아들의 어학 능력이 늘기를 기다렸다가, 때가 무르익자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게 했다. 중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창숙의 회고록에는 ‘북경중학’에서 수학하게 했다고 쓰여 있다.3 ‘북경중학’이 학교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베이징에 있는 중등교육기관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근대 정규 교육을 이수하게 했다.

제 아들만이 아니었다. 김창숙은 조선 청년들의 베이징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1923년 현재 베이징에서 조선인 유학생 수는 600여 명이었다. 그중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200여 명이고, 무관학교에 적을 둔 사관생도는 70여 명이었다.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은 해가 갈수록 늘었다. 그래서 1923년 9월17일 베이징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력자 60여 명이 모여 유학생을 후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그 첫 자리에 김창숙의 이름이 거명된다. 그날 회의에서 입학 준비를 위한 강습소와 유학생들 단결을 위한 친목 클럽을 조직하기로 의결했다.4

그러나 큰아들 김환기의 베이징 시절은 길지 않았다. 1년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조선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질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회고록을 보자. 1926년 “7월에는 환기의 귀국을 명하였는데 그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고 적혀 있다.5 의문이 든다. 실제 병에 걸렸다면 국내보다도 도리어 베이징에서 더 잘 치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유학·체류 경비를 뒷받침할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명을 부여해 입국시켰을 수도 있다.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해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종사한 바 있다. 그의 베이징 귀환 시점과 아들 김환기의 국내 입국 시점이 두 달의 시차를 두고 나란히 이어졌다.

갑자기 귀국한 아들의 비참한 죽음

김환기의 귀국 결정이 지혜롭지 않았음은 이후 사건 전개를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귀국 뒤 얼마 안 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유림단 독립운동자금 모금 사건’이 발각돼 검거 선풍이 일었다. 사건 주모자 김창숙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김환기는 이 회오리바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환기는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됐다. 1927년 2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출옥했다. 19살 청년의 신체는 손쓸 여지도 없이 훼손됐다. 그는 치료 중에 1927년 12월20일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김창숙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만년에 작성한 그의 회고록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차마 그 아픔을 되살려 적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참혹한 소식을 들은 뒤로 자신의 병이 더욱 깊어졌다고만 썼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아들 환기(換基)에게, 계해(1923) 5월 북경 의원에 있을 때’, <국역 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382~383쪽, 1979년.
2.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39~740쪽, 1979년.
3. ‘벽옹 73년 회상기’, 746쪽.
4. ‘북경 유학이 從此 편리’, <조선일보> 1923년 10월5일치.
5. ‘벽옹 73년 회상기’, 7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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