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책의 일] 위선적인 것 쓸데없는 짓 자기기만

스트레스 쌓일 때 도서관에 가는 남자가 책에서 읽은 ‘하지 말아야 할 것’
등록 2020-10-25 13:56 수정 2020-10-30 01:46

처음엔 믿지 않았다. 직장인인데 일주일에 댓 권의 책을 읽는다는 말을. ‘얇은 책만 골라 보거나 페이지를 막 넘기겠지.’ 늘 자기 한계를 기준으로 남을 가늠하는 나쁜 버릇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열 번 읽었고, 문학 전공자지만 중력파·양자물리학에 관한 책도 탐독한다는 걸 알았다. 독서할 때는 색색이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서평도 쓴다.

광고회사에서 20년 넘게 마케팅을 한 그는 스트레스 쌓일 때 퇴사를 고려하기보다 사내 도서관에서 한 시간쯤 책을 보며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꾀했다. 2002년 월드컵이 8강을 향해 갈 때 화젯거리는 단연 축구였다. 하지만 그 시절 그는 선배들과 회식 자리에서 한강의 작품 얘길 했다가 분위기 깬다는 핀잔을 들어 그길로 가방을 챙겨 집에 돌아왔다.

가장 많이 읽는 것은 소설이다. 독서량의 20%쯤 된다. 가장 좋아해 여러 번 읽은 작품은 <칼에 지다> <태백산맥> <칼의 노래>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김현·김훈·신형철이다. 신형철은 그보다 연하지만 ‘형’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문장을 잘 써서 신형철이 추천사를 쓴 책은 모조리 산다.

가장 적게 읽는 것은 시다. 여러 번 노력했지만 남들만큼 시에서 뭔가를 얻지 못해 시와 가까워지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엘리엇과 오든과 포의 시에서 자기 소설의 문체를 구축한 오에 겐자부로가 그를 만난다면 시 읽기의 비법을 전수해줄 수 있을까?

책은 반드시 사서 읽는데, 월 40만~50만원을 쓰며 오프라인 서점만 이용한다. 책이 쌓여 집이 비좁지만 헌책방에 내놓는 일은 꿈에도 생각 못한다. 돈 주고 샀어도 마음을 쏟은 것인데 되파는 일은 그 마음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같기 때문.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진지한가를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는 ‘재독’(再讀) 여부다. 잘 이해되지 않는 구절을 마주쳤을 때 노력해서 해소하는 것과 뭉개고 넘어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특히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전체 흐름 속에 생생한 느낌을 주워 담다가 재독하면서 하나하나의 구절이 훨씬 깊은 이해를 이룬다. 편집자인 나도 원고를 최소 세 번 읽는데, 그때마다 더 깊은 물을 길어올리는 것 같다. 그는 5독, 10독까지 한다. 예컨대 <칼에 지다>를 처음 읽은 건 결혼 전으로, 그땐 무장들의 실력에 빠져들었지만, 결혼 후 다시 읽으면서는 사무라이들의 가족을 건사하려는 ‘성’(誠)에 마음이 훨씬 가닿았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력이 달리는 물리학이나 고전철학은 윤곽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핵심에 다가가려 한다. 즉,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보는 열 가지 관점을 접한 뒤 중심 이론으로 들어간다. 니체 또한 이런 식으로 읽었는데,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 많은 도움을 줬다.

책 선물을 하거나 받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 책의 세계는 너무 넓어 선물하는 이의 의도가 수신인에게 정확히 전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이문 전집을 선물받은 것은 잊지 못한다.

지행합일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행’(行)은 ‘하는 것’을 의미할뿐더러 ‘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한 지침까지 준다. 책은 그가 살면서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가령 위선적인 것, 쓸데없는 짓, 자기기만 등등. 그는 이제 막 퇴사하고 출판계에서 기존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마케팅을 해보려 한다. 그는 48살의 서울 행당동 주민 임현규씨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