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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내게 말한다 “열심히 살아줘 고마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15년 노숙인 글 모음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등록 2020-10-17 08:08 수정 2020-10-23 01:29

서울 영등포역에서 서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시대를 건너뛴 듯한 허름한 지역이 나타난다. 이곳은 맞은편 성매매업소 지구와 함께, 영등포에서 단 두 개 남은 청소년출입금지 구역이다. 성인에게도 두 명씩 짝지어 지나다닐 것이 권장되는 이곳은 쪽방촌 밀집 지역이다. ‘출입금지’ 구역에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밥값 선불 200원이란다./ 주머니를 뒤져본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붙잡는다./ 외상됩니다.”(고 홍진호) 보통 ‘무료급식’이라는 급식에 가격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다. 공짜 비슷한 밥이 서글픈데 비까지 오는 날엔 더 서글퍼진다. 밥, 국… 짧은 것들이 한없이 늘어진다. 그래서 비 오는 날 먹는 밥은 ‘바아압’이다(권일혁).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삼인 펴냄)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이 2005년 생긴 이래 이 과정의 노숙인 글을 모았다. 1년 과정인 이곳은 문학, 역사, 철학, 예술사에 ‘글쓰기’가 정규 과목으로 편성돼 있다. 발간사 첫머리 말대로 이 과정에는 “유서 한 통쯤은 몸에 지니고 있거나 자살 미수 2범은 돼야 들어갈 수 있”다. 당장 의식주가 없는데 무슨 인문학이냐는 ‘개똥철학’으로 이 과정을 바라봤지만, 인문학은 자신을 돌아보고 ‘희망’이란 씨앗을 틔우는 힘을 주었다. “이게 다 인문학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온종일 일하고 저녁 수업은 피곤했지만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울을 만들었다. …거울은 깨지지 않고 내 앞에 있어 ‘인간이 되어라’ 주문을 외운다.”(김대영)

글쓰기 과정은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기구한 인생을 짧게 요약했다. 고모집에서 크다 간 보육원에서 두 누이를 처음 만난다. 아들이라 자신만 고모집에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만에 연락해 만난 누이가 준 통장에는 만나지 말자는 편지가 들어 있다(노기행). 결혼하려던 여자가 죽자 어부가 되고 인천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지갑을 도둑맞고 그대로 걸음을 멈춰버렸다(고 이대진). 자살만 생각하던 박일웅은 ‘이젠 살아보고 싶다. 아니 제대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고맙다. 열심히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 표양종은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용산과 남대문 일대의 폐지를 주우며 “같은 시간에 시작과 마감을 하는 것이 특권”이라고 말한다. “물려줄 거라고는 가난밖에 없지만 그래도 애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고 문충섭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글쓴이에 고(故)가 붙은 사람이 많다. 15년 사이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다. 홍진호, 유창만, 신득수, 문재식, 고성원, 전태선, 이덕형. 글은 출입금지 지역의 그들을 기억하는 문이 되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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