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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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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직시] 놀기도 잘 노는 멋진 언니, 박세리

남자 운동선수 판치는 방송계에 블루칩으로 등장
등록 2020-09-22 11:06 수정 2020-09-25 01:16
여성 첫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네이너)인 박세리는 은퇴 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는 언니>에서는 여성 운동선수들을 이끌고 신나게 놀러 다닌다. E채널 제공

여성 첫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네이너)인 박세리는 은퇴 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는 언니>에서는 여성 운동선수들을 이끌고 신나게 놀러 다닌다. E채널 제공

누군가는 그를 “애국가 영상에 나오는 분”이라 말한다. 1998년 US 여자오픈에서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 샷을 날리던 모습은 22년이 지난 지금도 박세리가 등장할 때마다 재생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통산 25회 우승이라는 전설적 경력의 소유자이자 시대의 영웅이던 그에겐 요즘 ‘리치 언니’라는 새 별명이 생겼다. MBC 예능프로 <나 혼자 산다>에서 근사한 집을 공개한 뒤다. “보통, 방송 나오는 운동선수는 남자가 많잖아요”라는 말과 함께 출사표를 던진 E채널 <노는 언니>에서 박세리는 여성 운동선수들을 이끌고 펜션으로 갯벌로 신나게 놀러 다닌다. 최근 크게 활기를 띠는 여성 예능의 흐름 안에서도 인지도와 호감도, 캐릭터성을 모두 갖춘 박세리는 뜻밖에 등장한 블루칩이다.

(은퇴는 벌써 했지만) 황금기입니다.

선수 시절 “골프가 인생의 모든 것”이던 박세리는 2016년 은퇴했다. 골프는 후회 없이 했기 때문에 “그립거나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서” 안 하고 있지만 <나 혼자 산다>나 tvN <서울 촌놈> 같은 프로그램에선 출연자들을 지도해주기도 한다. “집에 있을 때는 소파에 곰팡이 날 만큼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하는 그의 집은 직접 설계와 인테리어에 참여해 자기 취향을 정확히 반영한 저택이다. 다른 층에 자매들이 산다는 면에서 많은 여성에게 ‘꿈의 집’에 가깝다. 느지막이 일어나 반려견들에 둘러싸여 혼자 점심을 먹으며 TV 시청을 즐기는 평범한 일상 역시 ‘아무것도 안 할 자유’를 꿈꾸는 바쁜 현대인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물론 그의 은퇴 뒤 생활이 한가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박세리는 올림픽 국가대표 여자골프 감독이자 사업가로도 활동하며 점점 늘어나는 방송 활동으로 최근엔 서울에도 집을 얻었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최상의 인생 2막이다.

(노는 건 처음이지만) 다 잘합니다.

2019년 JTBC <아는 형님> ‘가을운동회’ 편에 출연한 박세리는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주종목은 골프인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이야.” 승부욕이 강한 그는 새로운 과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웃기기 위한 게임이라도 열정적으로 임한다. <노는 언니>의 실내 체육 경기 ‘언림픽’ 편에서도 박세리는 헬멧 골프, 물감 펜싱 같은 종목에 누구보다 진지하게 몸을 던졌다. 2020년 8월 유튜브 ‘스튜디오 룰루랄라’ 채널에서 시작한 <인생 한 번 쎄리박>은 말로는 툴툴거리고 귀찮은 척하면서도 일단 시작한 건 뭐든 다 하는 박세리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콘텐츠다. 운동 끊은 지 4년 됐는데 러닝 동호회에 나가 발꿈치가 벗겨지도록 달리고, 춤이라곤 춰본 적 없지만 댄스 클래스에서 처음 배우는 트워킹(상체를 숙여 엉덩이를 빠르게 흔들며 추는 춤)을 재미있어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뿐이라고 머쓱해하면서도 처음 만난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인다. “모든 트러블샷에는 위험부담이 있는데, 그걸 두려워하면 절대 그 자리에서 헤어나올 수 없어요. 경험이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Olive <밥블레스유 2>)라는 그의 지론은 예능에서도 통한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먹는 낙으로 삽니다.

2년째 다이어트한다고 말하면서도 널찍한 팬트리에 식자재를 가득 채워두고 살며, “뭐든 많은 게 좋아. 든든하게 뭐든 채워놔야 해”라고 말하는 박세리는 ‘먹는 언니’이자 ‘먹이는 언니’다. <노는 언니>에서 장을 볼 때마다 “사고 싶은 대로 다 사!”라고 호쾌하게 지시하고 주전부리를 잔뜩 챙겨가 멤버들에게 나눠주며 다양한 명언을 남겼다. “아침에는 왕처럼 먹어야 한다” “다이어트에는 햄버거지” “느끼할 땐 매운 거, 허전할 땐 고기, 배부를 땐 단걸 먹어야 한다” 등이다. ‘먹방’이 대세라지만 여전히 미디어에 노출되는 여성은 극도로 마른 몸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먹는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여성이 즐겁게 식욕을 드러내는 모습에 속이 시원해지는 재미가 있다. 물론 이쯤 되면 ‘다이어트’는 그냥 의미 없는 추임새 같은 거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을 듯하지만.

(혼자 살지만) 충분합니다.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더라도 결혼하지 않으면 그냥 ‘미혼’에 불과할까. 박세리 역시 가는 곳마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1월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에서 김수미는 박세리에게 “하루살이도 새끼를 낳는데, 여자로 태어나서 열 달 애기도 품어보고 알콩달콩 살다 가는 것도 괜찮다”며 “내 임자는 어딨지? 나도 빨리 애 낳고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 들지?”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지금 제 생활이 저한테는 편안하게 잘된 거 같아요. 결혼은 조심스럽고 현실이니까”라며 완곡하게 넘겼지만, 김수미는 다시 “인생에 제일 중요한 거지. 어쩌면 골프보다 중요한 거”라며 결혼을 종용했다. 무례하기까지 한 분위기였지만, 이런 말들에 이골이 난 듯 무심하게 밥을 먹으며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겠죠”라고 대답한 그의 태도에는 대체로 일관성이 있다. 그렇게까지 절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외로운 시간을 안 만든다”고 답하고, 계속 혼자 살 거냐고 하면 “평생은 혼자 안 살죠”라고 웃어넘기며, 연애에 관심은 있다면서도 “오래 만난다 해서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자. 지금은 혼자서도 잘 사는 언니, 박세리의 시대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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