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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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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문장] ‘말해야 알지’에서 ‘말하면 뭐 해’로

남성에게 이성을 여성에게 감성을 배분하는 가부장제
등록 2020-09-19 05:14 수정 2020-09-22 01:37


여자: 당신은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남자: 당신 입에는 늘 불만이 걸려 있어.

여자: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러니까….

남자: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 모든 걸 당신 말대로 할 수는 없다고.

(침묵)

남자: 원하는 게 있어?

여자: 신경 쓰지 말아요.

캐럴 길리건·나오미 스나이더, <가부장 무너뜨리기> 이경미 옮김, 심플라이프 펴냄, 2019년

화가 나면 아무 말도 안 하는 여자들이 나는 이해가 안 됐다. 큰소리로 싸우는 게 보긴 흉해도, 침묵으로 자신과 상대를 곯게 하는 냉전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말해야 알지, 그랬다. 요즘은, 말하면 뭐 해, 그런다. 입 닫고 귀 닫고 문 닫고 혼자서 혼자를 곱씹는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사람은 원래 외로운 법. 성숙한 인간이라면 상실을 받아들이고 혼자서도 잘 지내야 한다. 혼자 잘 지내는 데 책만 한 게 있나. 나는 책을 펼쳤다.

사회심리학자 캐럴 길리건과 인권변호사 나오미 스나이더가 함께 쓴 <가부장 무너뜨리기>. 뭘 무너뜨리고 싶은 의욕은 없지만 캐럴 길리건이란 이름 때문에 택했다. 남성 중심적인 심리학 전통을 뒤흔든 그의 대표작 <다른 목소리로>를 읽고 내용은 물론 그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반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며 독자와 소통하는 그가 다정한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젊은 후배와 함께한 이번에도 공감과 소통의 글쓰기는 여전했다. 두 사람은 노골적인 가부장의 화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왜 가부장제는 이토록 끈질기게 유지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고, 그래서 이 책을 썼단다. 이 질문엔 오래된 답이 있다. 기득권을 가진 상위계층에 부와 권력, 지위를 주기 때문이라는. 하지만 저자들은 이 표면적 이유 외에 사람들이 가부장제를 받아들이는 심리적 동인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을 상실의 심리학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맺기는 인간의 조건이고 삶의 동력이다. 한데 관계엔 반드시 상실의 아픔이 따른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스나이더처럼 상실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가부장제는 도피처를 제시한다. 사랑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사랑엔 상실이 따르기 마련이니 고통을 피하고 싶으면 사랑을 포기하라며,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성숙이라고 가르친다.

가부장제는 이렇듯 삶에서 사랑을 분리하고 관계와 자아, 감정과 이성을 분리한다. 그리고 남성에게는 앎(이성)을, 여성에게는 돌봄(감정)을 배당한다. 이 젠더 이분법을 내면화하면, 남성은 감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여성은 자신의 앎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용문 같은 소통 불능의 대화가 이뤄진다.

저자들은 이 분리, 분열이 고독한 개인을 낳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지적한다. 젠더 이분법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에서 지배층은 공감 능력을, 피지배층은 자기주장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정치적 저항에서 앎과 돌봄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관계를 맺고 타인에 공감할 때 우리는 부당함에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래서 길리건은 가부장제에 대비되는 말은 가모장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얘기한다.

다정한 두 여성 덕분에 내가 택한 침묵과 고독이 가부장제에서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책일 뿐이며, 이 방어막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관계 맺기 위해 ‘건강한 저항’을 실천하며 내 앎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왜 입을 떼기가 힘들까. 그 많던 나의 수다는 다 어디로 갔을까.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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