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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하던 십자가형, 승리의 상징이 되다 <도미니언>

기독교의 서구사회 지배 역사 <도미니언>
등록 2020-09-12 11:44 수정 2020-09-17 00:58

2000년 전 로마제국 변방 속주에서 하층계급 출신 인물이 “로마의 국법 질서를 해치는 중대 범죄”로 처형당했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한 축을 이루는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다. “오래전에 사라진 제국에서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세상을 바꿔놓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영국의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가 쓴 <도미니언>(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은 누구나 가질 법한 의문을 정교하게 파고든다. 고전 고대, 기독교 세계, 모데르니타스(근대)까지 연대기순 3부로 짜였다. 기독교는 적어도 1천 년 넘게 서유럽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을 촘촘히 지배했다. 서구의 근대는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과 결별한 자리에 인간과 이성을 세우는 것으로 열렸다. 그러나 지금도 구석구석엔 기독교 문화의 뿌리가 깊다. 지은이는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구사회와 서양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결과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탐구한다. 방대한 사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팩트’(역사적 사실)를 추적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직조해내는 솜씨도 탁월하다.

지은이는 고대 로마 시절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경멸을 받은 처형은 없었다”는 끔찍한 형벌, 즉 십자가형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서론을 연다. 십자가형은 “반항적인 노예에게 가장 적합한” 징벌이었다. 보란 듯이 고문받고 사지가 활짝 벌려진 채 매달렸으며, 숨이 끊어진 주검은 공동묘지 구렁텅이에 버려졌다. 기록 따위 있을 리 없다. 예수의 죽음은 예외였다. 선고와 징벌 과정을 상세히 다룬 4건의 기록이 고대부터 전해진 것. 부유한 숭배자가 주검을 요구해 경건하게 장례를 치렀고, 부활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보태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인 분으로 칭송받았다.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도 개종했다. 십자가형도 폐지했다. 십자가가 더는 ‘수치’가 아니라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됐다.

당시 지중해권의 다신교에서 인간이 신들의 반열에 오르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단, 신격을 얻는 인간은 정복자·영웅·제왕 같은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노예의 죽음을 맞은 자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혐오스럽고 기괴한 일이었다. 이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군주에게도 깊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하느님이 강자보다 약자에게 더 가깝고,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더 아낀다”는 획기적인 생각이 자리잡았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란 모순과 역설이다. 그렇게 로마교회는 유럽인들에게 ‘가톨릭(보편)’ 신앙이 됐다. 이후 유럽이 미지의 대륙을 정복해 ‘약속의 땅’으로 축성하고 피정복자들을 개종하려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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