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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영수증] 살수록 고개끄덕여지는 이장세 5만원

살수록 고개끄덕여지는 이장세 5만원
등록 2020-09-08 10:22 수정 2020-09-10 01:27
마을 쓰레기 버리는 날. 집집이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서, 종류별로 정리하고 버리는 일도 마을에서 함께 하는 공동작업 중 하나다.

마을 쓰레기 버리는 날. 집집이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서, 종류별로 정리하고 버리는 일도 마을에서 함께 하는 공동작업 중 하나다.

몇 달 전 일이다. 마당 텃밭에서 풀을 매는데, 갑자기 한 분이 찾아와 집마다 돈을 걷고 있으니 우리 집도 5만원을 내야 한다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얼떨떨했으나, 서서 기다리고 계시니 퍼뜩 손에 잡고 있던 호미를 내려놓고 현금을 찾으러 집 안에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을 정착 기금을 명목으로 큰돈을 요구해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많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큰돈은 아니지만, 혹시 지금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게 아닌지, 다른 집들은 내지 않는데 타 지역에서 이주한 우리 집만 내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조심스레 이 돈을 어디에 쓰는 거냐고 여쭤보니, 그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돈을 걷으러 온 분은 우리 집이 속한 구역을 관리하는 반장님이셨고, 바빠서 다달이 수금을 못하다가 이장 수당 겸 마을 기금 명목으로 집집이 돈을 한꺼번에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 이른바 ‘이장세’를 둘러싸고 각 지역에서 논란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예부터 마을의 수고스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이장에게 집집이 곡식을 모아서 주던 ‘모곡제’가 곡식 대신 현금을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설도 있었고, 지자체에서 이미 이장에게 지급하는 월급과 각종 수당이 있는데 그와 별도로 마을 자체적으로 돈을 걷는 관습을 폐지해달라는 민원이 이어져 정부 차원에서도 각 지자체에 공문을 내렸다는 기사도 보았다.

비상식적인 이유로 합리적이지 않은 돈을 마을에서 요구하는 사례는 문제이지만, 시골 마을에 살다보니 국가나 행정의 공백을 ‘마을’이 채우고 있음을 체감할 때도 많다. 도시에 살 때 내가 주민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것이 전부였다. 대신 기본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행정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촘촘하게 관리·제공됐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구청이나 주민센터부터 찾았다. 하지만 이곳 시골에서는 ‘마을’이 앞선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시간과 돈을 들여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이 수두룩하다.

우리 마을 공동 쓰레기장 역시 마을기금으로 만든 것으로, 마을 주민이 청소하고 관리한다. 마을 인근 도로에 차량 통행이 어렵지 않게 수시로 풀을 베는 것도 마을 주민이 예초기를 들고 나서야 한다. 산에서 끌어온 물을 마을 주민이 식수로 공동 이용하는데, 혹시나 물이 나오지 않으면 깊은 산에 올라가 해결해야 한다. 그 밖에도 ‘마을’ 단위로 이뤄지는 일이 꽤 된다. 다만 워낙 고령화한 탓에 마을에서 가장 젊은 이장님 내외가 절대적으로 많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장님 내외의 전화는 늘 끊임없이 울린다. 시골살이가 처음인 우리 부부 역시 어려움이 생기면 1순위로 찾는 곳이 이장님댁.

영수증에 찍힌 5만원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입장과 평가는 다르겠지만, 낯설기만 했던 시골 마을에서 시간이 쌓일수록, 마을 어르신의 삶과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 늘어난다.

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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