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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김숨② ‘뿌리 뽑힌 사람들’

등록 2020-08-14 11:34 수정 2020-08-16 05:07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김숨① “간절해지니 문장이 내게로 왔다”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03.html

소설이 내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구나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대학생 이한열의 유품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도 김숨의 첫 ‘위안부’ 피해자 소설인 <한 명>과 같은 해(2016년)에 나왔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이 마모된 것을 복원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미술품 복원사를 공부하던 중, 마침 이한열이 신었던 닳아 해진 운동화를 복원하는 전문가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이한열의 운동화를 소설로 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쓴 소설이 내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작품을 쓰면서 “이 소설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리고 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 시야가 넓어지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썼다기보다는, 내게 온 것을 거부하지 않고 썼는데. 그게 제 세계를 확장해준다고나 할까… 굉장히 조심스러웠죠. 문장 하나, 표현 하나…. 유가족이 계시고,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니까요.”

작가는 “위안부 연작 소설들이나 는 겸손한 글쓰기를 하게 했던 작업”이라고 했다. “윤리적 잣대로 글을 검증하는 것엔 절대 반대하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윤리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1937년 소련 연해주의 조선인 강제이주 사건을 다룬 최신작 <떠도는 땅>도 안타까운 비극을 다룬 작품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롭다. 소설의 무대는 사방을 널빤지로 막아버린 화물열차라는 폐쇄 공간이다. 애써 일궈온 삶터에서 쫓겨나 낯설고 황량한 동토로 실려 가는 사람들이, 옴짝달싹하기 힘들 만큼 빼곡히 들어찬 열차칸에서 풀어놓는 개인사와 격랑의 동북아 현대사가 씨줄 날줄로 직조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벌어진 내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여러 사건에 휩쓸리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서술된다.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
“아, 흰 파(왕당파 백군) 시절에는 내 아들을 붉은 파(볼셰비키 적군)라고 감방에 가두더니, 붉은 파 시절이 오니 흰 파라고 감방에 가두는구나!”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해 살던 한인 1·2세뿐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대의에 기꺼이 동참했던 지식인들도 정체성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산당 가입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조선인들도 소비에트 인민이 돼야 한대요”/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조선인, 러시아인, 소비에트 인민….”/ “그 셋 다 아닌가요? 당신은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는 소비에트가 됐고요.”/ “셋 다일 수는 없어.” 소설은 ‘가을에 떠난 열차가 겨울이 돼서야 최종 목적지에’ 멈춰선 땅에서 고단한 죽음과 새로운 생명이 교차하는 풍경으로 끝난다.

읽고 쓰는 행위의 황홀함

“뿌리 뽑힌, 떠도는 사람들에 늘 관심이 있었고, 강제이주 열차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 공부를 하면서 썼고 전문가의 감수도 받았지만, 역사소설을 쓴다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죠.” 작가는 한때 최고의 호황을 누리다가 쇠락한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썼던 연작 단편들과는 다른 장편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김숨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24년째 소설을 쓰는 작가는 머뭇거렸다. 대답이 ‘싱겁다’고 할까, ‘김숨답다’고 할까. “음…, 문학이 뭔지 모르겠어요…. 소설은 지금 제 일부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소설 쓰기이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같아요.”

뻔한 질문이겠지만, 내친김에 마저 물어봤다. 좋은 글, 좋은 문장이란 무엇일까? “저한테 ‘좋은 글’은 영감을 주는 글이에요. 그게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읽는 행위도 쓰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쓰기의 황홀함을 주는 글이죠.” 낮고 조용한 작가의 말투에 설핏 또 다른 생기가 스쳐간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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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내가 아는 김숨은 ‘가만히’ 있는 사람이다. 가만히 이야기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웃는다. (…) 그는 기척도 없이 동료(문인)들이 웃고 떠드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선 그 흔한 화장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숨소리 또한 작았다.”

김숨 작가의 2011년 소설집 <간과 쓸개>에 발문을 쓴 하성란 작가의 말이다. 9년 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고백건대, 작가를 만나기 전 기자의 마음엔 설렘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워낙 말수가 적거나, 말하더라도 기사에 ‘주워담을 알맹이’가 없으면 어떡하나. 작가의 방대한 작품을 다 읽지 못한데다, 상당수 단편에 짙게 깔린 음울한 분위기도 노파심을 보탰다. 지레짐작이었다. ‘조용하다’는 건 ‘떠든다’의 반대말이 아니라 과잉과 거짓이 없고 겸손하다는 뜻이었다.

다시 고백건대, 김숨 작가와의 만남은 평소 잊고 살기 쉬운 삶의 어떤 태도를 환기해줬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낮고 깊은 응시, 열린 공감과 차분한 균형감.

“그렇다고 김숨이 마지못해 (…) 몸만 자리에 앉아 있고 정신과 영혼은 딴 세상에 간 듯 벗어나 있는 사람도 결코 아니다. 그는 성실하다. 소설은 물론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성실하다. 가만히 있다는 건 곧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손짓이나 얼굴에 스쳐 가는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도 빨리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에 그가 소리 없이 활짝 웃는 걸 여러 번 보았다.” 하성란이 앞 발문에서 김숨 작가를 말한 문장들은 마치 9년 뒤 <한겨레21>이 만나게 될 인터뷰 후기를 미리 써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굳이 다시 길게 인용한 이유다.

세 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주제나 장르가 있는지” 물었다. 작가가 ‘조용히’ 답했다. “(한 작품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또 ‘가지치기’를 해요. 어떻게 흘러갈지, 흘러가봐야….(수줍은 웃음) 네, 만들어가봐야죠.”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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