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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김혜진① “사람이 항상 궁금해요”

등록 2020-08-14 08:07 수정 2020-08-18 00:30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작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소설가 김혜진(37)은 밖을 내다볼 수 있고 사람이 많은 대형 카페를 좋아한다. 웅웅 울리는 손님들 목소리와 쉭쉭대는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그 카페에서 그는 소설을 쓴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은 점심으로 무얼 먹었을까”를 궁금해하고, 길가에 버려진 폐가구를 보며 “어떤 집에서 내놨을까, 이 사람들은 어디로 이사 갔을까”를 상상해본다. 이러한 호기심과 관찰에서 나오는 통찰은 2012년 등단작 ‘치킨런’부터 최근작 <불과 나의 자서전>까지 장편 4권과 소설집 1권의 밑바탕이 됐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은 불안정한 청년노동(구직)자(‘치킨런’ 등), 레즈비언 딸과 요양보호사 어머니(<딸에 대하여>), 회사의 희망퇴직 압박에 놓인 중년노동자(<9번의 일>), 사랑에 빠진 노숙인(<중앙역)>까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이들이다. 소설은 이들의 ‘일’과,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풀어내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실을 더욱 사실처럼 그려낸다. 김 작가를 7월2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사람이 항상 궁금하고, 아주 밀착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많죠. 거창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일을 하는 사람의 내면은 무엇일지….”

김 작가가 초기에 쓴 단편들의 공간적 배경은 대부분 공적인 장소다. 우리가 출퇴근하면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지나치는 광장이나 공원, 역 같은 곳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때는 (서울) 서촌에 살고 있었어요. 주로 카페에서 소설을 쓰는데, 자전거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나와요. 그러면 차례로 광장을 지나치게 되죠. 한국의 광장이란 곳이 사람들이 얘기하러 나오는 공간이기도 하고, 밤이 되면 적막하기도 하죠. 시간에 따른 변화도 자주 보게 됐고요.”

카페에서 광장으로

그러나 익숙한 장소를 다룬다고 해서 이야기가 익숙한 것은 아니다. 시선이 광장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구석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핵심보다 곁가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는 작가의 말과도 맞닿는다. 단편 ‘광장 근처’는 광장 한쪽에서 자신이 소장했던 오래된 DVD를 파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가 손님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곳 역시 노점 건너편 40층 빌딩 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다. 단편 ‘쿵후하는 자세’의 주인공은 서울 광화문부터 시청까지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내는데 마주치는 이들마다 그에게 ‘자격’을 묻는다.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서 일하던 친구의 제안으로 노숙인 아웃리치 활동을 따라다닌 것을 계기로” 쓰게 된 <중앙역>은 흔히 생각하지 못하는 노숙인의 사랑을 담았다. “광화문 근처를 왔다갔다 하다가 KT 사옥 앞에서 발견한 농성천막을 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노조에 연락한” 것이 <9번의 일>이 됐다.

이력서에 담길 수 없는 일들

“‘앞으로 뭘 할 생각이니?’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그렇게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준비하는 게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상하게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 그 당시, 나는 내가 하던 일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지금 하는 일들은 어디까지나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내 삶에서 완전히 삭제되어도 좋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언유주얼> 2019년 8월호에 실린 ‘이력서에 담길 수 없는 인생들’이라는 에세이에서 김 작가는 말했다. 그는 2012년 등단하기 전까지 숱한 ‘일’을 해왔다.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일들. 그가 “저랑 가까이에 있었던 소설, 제 생활과 좀 닿아 있는 소설”이라고 평가한 단편집 <어비>에 실린 (대부분 청년인) 주인공들의 모습과 겹친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일 같지 않은 일’을 한다고 무시당한다. “일다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소설 쓰는 것은 직장이 없잖아요. 부모님은 아직도 ‘네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세요. 직장에 다니는 동생과 저는 똑같이 일하지만, 같은 대우를 못 받아왔어요. 그런 차원에서 ‘일다운 일’이 뭘까 질문했지요.”

‘일다운 일’을 하지만, 그 일에서 밀려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3년 뒤에 나온다(<9번의 일>). 평생 일만 보고 살아왔던 주인공은 자존심 따위는 일찌감치 버리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종국엔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일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일은 삶을 책임지는 것이고 삶의 기반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월급 받는 것을 넘어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것으로서 중요하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일을 할수록 내가 훼손되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성장하는 것도 자기가 깎여나가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소설을 쓰면서 ‘일’에 대해 김 작가가 품었던 생각이다.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선과 악의 경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나는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가 시키면 합니다. 뭐든 해요. 그게 잘못됐습니까?” -<9번의 일>

소설 속 장면들은 무척 사실적이어서 마치 르포기사를 읽는 듯하다. <9번의 일>에서 기술직으로 26년 동안 일했던 ‘그’에게 직무와 관련 없는 저성과자 교육을 하고, 직무와 관련 없는 상품 판매 업무를 맡기고, 시골 소읍으로 발령 내는 일들은 그동안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 직원들을 괴롭히던 현실과 똑 닮았다. <중앙역>에서 노숙인 ‘나’가 사랑하는 노숙인 ‘여자’가 병에 걸린 뒤 치료를 위해 전 남편을 찾으러 떠나는 장면은, 한국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인 ‘부양의무제’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딸에 대하여>에서 요양보호사인 ‘나’가 요양병원에서 지급되는 기저귀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질책받는 것이나, 자신이 돌보던 무연고 노인 ‘젠’의 사후를 걱정하며 ‘무연고자 주검’ 처리 절차를 서술한 것 역시 노후·사후 복지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주로 다루는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김 작가는 이러한 세상의 평가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거나, 부채감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저를 포함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제가 경험한 일 가운데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겁니다. 저는 뭔가 쓰려고 하는 상태고, 그때 만나는 사람이나 경험한 상황에 따라 우연성이 발생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 문제를 김 작가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려 한다. 소설은 “피해자로 뭉뚱그려진 인상이 아니라 개인의 아주 개인적인 것, 아주 작은 것”에 천착하는 것이기에 ‘불쌍한’ 사람들의 ‘불쌍한’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등장인물들은 주변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9번의 일>에서 ‘그’는 자신의 퇴직을 압박하는 회사가 부여하는 일인 ‘통신탑 설치’를 완수하기 위해 해당 마을 주민들과 충돌한다. <중앙역>의 ‘나’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재개발 지역 철거용역으로 일하며 원주민을 괴롭힌다. ‘사회적 약자’라 호명됐던 이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윤리적’으로 옳다고 말하긴 어렵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타인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사정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개인을 볼 때,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어요.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얇은 종이 한 장의 경계뿐이 아닐까 생각해요.”

*21이 사랑한 작가 김혜진② 타협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097.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김혜진의 무명씨

김혜진 작가의 소설에는 ‘이름 없는’ 주인공이 많다. <9번의 일>의 주인공은 ‘그’이고,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은 ‘나’이다. <중앙역>에도 ‘나’와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에게 한 번이라도 ‘호명’될 법도 하지만 소설 내내 실명이 불리는 상황은 없다.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왠지 등장인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면서도,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함에 몰입감을 주기도 한다. 김 작가는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이 없기도 하고요. 소설 안에서 이름을 쓰게 될 때 저 스스로가 조금 경직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이름들은 그 이름 자체가 가진 어떤 편견과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중앙역>의 주인공 ‘나’는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지면 좋겠다”고 말할 뿐, 어떤 이유에서 한뎃잠(노숙)을 자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됐다. 김 작가는 “과거의 서사를 넣으면 어느 정도여야 할지 고민했고, 과거를 언급하지 않았을 때 폭넓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소진해야 할 젊음이 버겁도록 남았다”는 ‘나’의 나이도, ‘나’에게 역을 떠나라고 했던 ‘나’의 연인 ‘여자’의 나이도 나오지 않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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