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글쭈글한 노인인데 머리는 짧고, 살집 없는 얼굴에 눈썹을 가늘게 그렸다. 눈물방울 모양 귀걸이는 한쪽만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데 주름진 목 아래로 넉넉한 젖가슴이 있으니 여성인 듯하다. 표정은 지적이며 슬프지만 존엄해 보인다. 손가락은 뒤틀리고 변형돼서 류머티즘관절염으로 평생 고생한 사람이다. 류머티즘관절염의 생생한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사고 말았다.
저자는 에이드리언 리치. 20대부터 류머티즘관절염이 있었고 더 어릴 때는 틱장애도 있었다. 아이 셋을 낳고 자신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 당시 불임수술을 받으려면 더는 아이를 갖지 않을 이유를 적어 수술을 승인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남편의 서명을 받아 위원회에 보내야 했다. 류머티즘관절염이라서 남성 배심원들이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임신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을 받아야 하는 시절이라니 놀라고 만다.
표지 사진을 찍은 사진가가 한 인간의 삶을 사진 한 장에 담았듯, 이 한 권의 책에는 여성운동가이고 레즈비언이며 학자이자 시인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대표 산문을 삶의 궤적에 따라 실었다. 이 존경스러운 인물을 이제야 만나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1929년생 그가 40대에 읽어준 ‘제인 에어’(1973년 글)는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제인 에어>를 읽지 않았다. 읽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서다. 초라하게 생긴 여자가 가정교사를 하러 가는 길에 남자를 만나는데 그 남자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면서 여자에게 기댄다. 그 뒤로는 안 봐도 뻔하다. 여자는 남자를 돌보다 사랑에 빠지고, 알고 보니 남자에겐 부인이 있고, 그래서 둘은 헤어진다. 남자는 이별에 좌절하며 거의 죽어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여자가 또 그를 돌보러 온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런데 리치 왈,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에, 리치의 명쾌한 풀이. <제인 에어>는 샬럿 브론테의 페미니스트 선언이다. 여성적 조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낭만적 사랑과 굴복의 유혹에 맞서 자신다움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다. 리치는 “늘 가정교사이고 늘 사랑에 빠진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정말로 이 소설을 읽은 걸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소설의 내용이 전혀 달라 보인다.
1997년 68살에 미국 국가예술훈장을 거부하며 쓴 기사도 있다. 정부의 예술기금이 폐지되는 것에 대한 항의다. 국민 대다수가 인종 간 부와 권력 격차 같은 재앙으로 굴욕을 당하는데 ‘토큰’(사회적 차별을 개선한 것처럼 보이도록 조직에 포함시키는 성적·인종적·종교적·민족적 소수자)이 되어 미국 정부에 의미심장한 영광을 안겨줄 수는 없다, 는 의미였다.
책의 마지막은 2007년 글이다. 내게는 ‘시란 무엇인가’로 읽힌다. ‘내가 원하는 종류의 시’라는 휴 맥더미드의 시를 인용했다. “지적 냉담함을 향한 저항이 특징인 시 (…) 사진 용어로 말하자면 ‘와이드 앵글’인 시… 날래고 능숙한 에너지로 반짝이면서 조용하고 침착한 에너지와 두려움으로 경계할 줄도 아는 수술실 같은 시 그 안에서 시인은 오직 수술 중인 간호사처럼 존재하는 시” 의대생들에게 수술실을 이야기하면서 보여줄 시를 찾았다. 두려움으로 경계할 줄 아는 의사가 되어라. 너희는 수술실의 시인이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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