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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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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동물] 어머니 따라 집에 온 네눈박이

멀쩡히 들어와서 제집처럼 산 개와 재호
등록 2020-08-08 06:01 수정 2020-08-10 00:49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평창 장날입니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후평 버덩을 지나는데 눈썹 위에 눈처럼 동그란 회색 점이 두 개가 있어 눈이 네 개처럼 보이는 네눈박이 검정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며 따라붙어 사람들 틈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옥고재를 함께 넘었습니다. 너무 천연덕스럽게 사람들 틈에 끼여 오니 다들 저 사람 개겠거니 하고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옥고재를 넘으면 계장리입니다. 계장리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은 어두니골이니 최종적으로 어머니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네눈박이는 멀쩡히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와서 제집인 양 아주 편안하게 헛간 구석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후평리에 친척집이 있어 혹시 개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라고 소식을 넣어봤지만 아무도 개를 찾으러 오지는 않았습니다. 마땅히 어디 돌려보낼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우리 집에 눌러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네눈박이가 새끼를 밴 것 같다고 합니다.

하룻밤만 자고 가면 안 돼요

네눈박이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쯤 지나 어머니는 외갓집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외갓집은 주천면 판운리인데 차 시간을 아는 것도 아니고 걸어오다가 버스를 만나면 잠시 타고 오기도 하고 종일 걸어서 집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날은 차를 못 만나서 약수비리 진입구까지 아기를 업고 걸어서 오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머스마(사내아이) 하나가 타박타박 어머니 뒤를 따라 자꾸만 걸어오고 있더랍니다. 어디까지 가느냐 물었더니 이름은 재호고 평창까지 간다고 합니다.

마침 버스가 오는 것이 보여서 여비가 있느냐고 물으니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너 나를 엄마라 하고 버스가 오면 같이 타고 가자고 했답니다. 재호는 어머니 옷자락을 붙잡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재호는 처음 만나는 순간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 같이 평창까지 왔습니다.

평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산마루에 걸려 있었습니다. 재호는 막상 평창까지 왔는데 갈 데가 없다고 아줌마네 집 가서 하룻밤만 자고 가면 안 돼요 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룻밤만 재워주기로 하고 재호를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재호는 원주 근방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합니다. 재호 2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엄마를 얻었다고 합니다. 재호는 의붓엄마가 잘못도 안 했는데 때리고 밥도 안 줘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 온 재호는 일찍 일어나 소죽 끓이는 아버지를 도와 나무도 날라오고 불도 때며 집안일을 돕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밥상도 같이 차립니다. 작은오빠가 열네 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호는 열세 살로 올해 5학년에 올라갈 차례라고 합니다. 나는 열한 살로 3학년을 휴학하고 아기를 보던 때였습니다.

당차고 넉살 좋은 꼬마 일꾼

재호는 제집처럼 아침을 먹고 눈치 빠르게 심부름하며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습니다. 차마 가라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네눈박이는 유독 재호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네눈박이의 사연을 듣고 재호는 개도 의붓엄마한테 혼나고 집 나왔을 거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얄궂데이, 뭔 개도 아도 멀쩡히 들어와서 제집처럼 살라 하나” 하십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여럿 재호 얘기를 듣고 자기네 심부름하는 아이로 달라고 합니다. 자기네가 일을 시키고 새경을 얼마를 쳐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재호에게 다른 집으로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여럿 있으니 다른 집으로 가서 돈을 받고 일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재호는 다른 집으로 가지 않겠답니다. 다른 집보다 조금만 줘도 좋으니 우리 집에 있겠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가을에 쌀 한 가마니를 주기로 하고 우리 집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자기 생일이 시월 보름날이니 자기는 시월 열나흗날 집으로 가 아버지와 형과 같이 생일을 보낼 거라고 했습니다.

재호는 덩치도 크지 않은데 당차게 꾀 안 부리고 일을 잘합니다. 넉살 좋게 “어머니, 아버지” 하고 오빠들보고는 “형아, 형아” 하고, 나보고는 꼭 “오빠가” 하며 오빠 노릇을 했습니다. 동생한테는 형 노릇도 꼬박 했습니다. 재호는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원주 큰 책방에 가서 책 한 권 사고 종일 만화책을 읽고 왔다고 합니다. 이다음 자기네 집에 갔다올 때는 만화책도 갖다주고 과자도 많이 사다주겠다고 합니다.

재호는 먹을 것이 있으면 네눈박이부터 챙깁니다. 어디 지나가다 새가 크게 울어도 쟤는 의붓엄마한테 맞았나 왜 저리 우나 합니다. 심지어는 길 가다 고양이가 혼자 가는 것을 보아도 의붓엄마한테 쫓겨난 것 아닌가 하며 돌아보고 돌아보고 합니다.

네눈박이는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네눈박이라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복덩이라 불렀습니다. 어디서 키우지도 않은 개가 굴러와서 새끼까지 낳았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너도나도 앞다퉈 복덩이 새끼를 달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한 달 반은 키워야 하는데 겨우 한 달이 되자 자기네 차지가 안 올까봐 일찍들 가져가버렸습니다. 재호는 제일 예쁘고 잘생긴 강아지 한 마리를 자기가 집에 갈 때 가져간다고 맡아놓았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지금부터 키우면 집에 갈 때쯤 큰 개가 된다고 자기 주고 다음에 새끼를 낳으면 가져가라고 강아지를 달랬습니다.

강아지 데리러 다시 올게요

네눈박이는 재호가 집으로 가기로 한 보름 전에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이번에도 제일 예쁘고 잘생긴 강아지는 재호가 맡아놓았습니다. 재호는 안달했습니다. 갈 날이 다가오는데 강아지는 빨리 크지 않습니다. 작은오빠는 “뭐 세월이 좀먹나. 좀더 있다가 강아지가 크면 가져가면 되지” 합니다. 재호도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알 수 없어서 미리 옷 한 벌 사고 쌀 한 가마니 값을 챙겨놓았습니다. 시월 열사흗날이 되자 내일 집으로 꼭 가겠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재호 보낼 준비로 바빠졌습니다. 종일 옷가지를 챙기고 밤중에 떡을 쪘습니다. 그 시절 떡은 최고의 대접이었습니다. 재호는 개들과 이별하느라고 헛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재호는 시월 열나흗날 짐을 다 챙겨 떡보따리를 메고 떠났습니다. 다시 올 때 그동안 약속한 것을 갖고 강아지를 데리러 오겠다고 많이 섭섭해하며 갔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강원도의 맛> 저자

*연재를 마치며: 세월의 갈피갈피에 묻어두었던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보았습니다. 으스름달밤처럼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 속 한없이 맑고 순박한 눈망울들. 예쁘고 귀엽고 재롱스럽고 앙증맞고 사랑스럽던 많은 짐승을 표현할 길이 없어 늘 아쉬웠습니다. 매번 설레는 마음으로 방현일 작가님의 그림을 기다리는 것은 행복한 덤이었습니다. 지면을 주신 <한겨레21>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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