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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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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베이징 안, 내 집이 어딨겠어요

베이징 ‘주거난민’들의 둥지, 옌자오
등록 2020-08-01 06:11 수정 2020-08-03 01:18
옌자오에서 베이징으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로이터

옌자오에서 베이징으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로이터

앞집 청년들이 이사를 갔다. 앞집에는 원래 일가족 네 명이 오랫동안 세 들어 살고 있었다. 1년 전쯤 그들이 이사 간 뒤, 한 달이 지나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자, 애가 탄 집주인이 복도에서 마주친 나를 붙들고 ‘소개비를 줄 테니 한국인 세입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은 지 20여 년 된 지금까지 리모델링이나 내부 수리를 한 적이 없는 그 집은,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쉽게 세입자를 구할 상태가 아니었다. 소개해줬다가는 욕만 바가지로 먹을 듯했다. 그런 집에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새로 이사 온 이는 남녀 청년 4명이다. 오며 가며 열린 문 사이로 슬쩍 보니, 집 구조가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임시 벽을 곳곳에 만들어 ‘쪽방’ 구조로 개조했다. 가족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자, 노랑이 같은 집주인이 ‘혁명적인’ 발상을 한 게 분명했다. 최근 베이징 집주인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쪽방 운영’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낯선 사람들이 아파트 방 한 칸을 원하는 기간만큼 장단기로 빌리는 것이다. 아파트 내부를 게스트하우스나 기숙사 형태로 개조해, 한 방에 이층침대를 두서너 개 놓고 침대 하나당 월세를 받는 형태도 많다.

중국에서는 주택이나 아파트 내부를 개조해 이렇게 여러 개의 작은 쪽방처럼 만들어 세를 놓는 형태의 월세방을 ‘췬쭈팡’(群租房)이라고 한다. 이런 임대 형태는 엄연히 불법이지만,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임대료가 비싼 상위권에 속하는 베이징에선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다.

게슈타포의 ‘아파트 계급론’

베이징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닌 이상, 부모의 재력이나 막강한 개인소득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범한 외지인들은 웬만해선 베이징에서 혼자 세를 얻어 살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은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합쳐’ 공동주거를 하거나 ‘아파트 쪽방’에 방 한 칸, 침대 한 칸을 얻어서 사는 일이 많다. 서울에 사는 청년들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겨우 몸 하나 누울 자리밖에 없는, 골방 같은 고시촌에서 기약 없는 ‘주거난민’ 생활을 하는 것과 똑같다.

앞집 청년들은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9층에 사는 남자가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나는 9층 남자를 ‘게슈타포’(독일 나치 정권의 비밀경찰)라고 부른다. 그는 주로 이 아파트 안에 있는 ‘수상한 자’나 ‘위험인물’을 적발해서 아파트 입주민 단체대화방에 공개하는 일을 한다. 특히 1월 이후 중국에 코로나19가 확산되자, 9층 게슈타포는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팔딱거리며 촉수를 들이댔다. 코로나19를 퍼뜨릴 만한 ‘위험분자’를 색출해야 한다며 종일 단체대화방에 아파트 주민들의 주거 상황을 씨불거렸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정확하게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청년들을 지목했다. 앞집 주인이 집을 불법 개조해 쪽방 임대를 한다며, 당장 세입자를 퇴거시키고 집을 원래 구조로 복구시키지 않으면 신고하겠다는 엄포도 놨다. 주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그는 ‘아파트 계급론’이라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우리 아파트가 인근 브랜드 아파트와 비교해서 가격이 더 쌀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런데 왜 갈수록 가격이 벌어지는가? 몇몇 한심한 집주인들이 집을 불법 개조해서 외지인들에게 쪽방 임대를 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가격과 품위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반영한다. 우리 아파트가 쪽방 임대로 유명해지면 아파트 가격과 우리의 품위는 어떻게 되겠는가?”

9층 게슈타포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많은 입주민이 쪽방 임대 근절과 세입자 퇴거에 찬성했고 관련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다. 며칠 뒤 앞집 청년들이 갑자기 이사했다. 다음날엔 집주인이 인부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집 안 가벽을 허물고 다시 원래 구조로 복구하는 공사를 했다. 노랑이 같은 집주인은 분명히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만위안에 산 집을 2.2만위안에 팔다

문을 열어놓은 채 분주하게 이삿짐을 싸는 청년 중 한 명과 인사하며 “어디로 이사 가냐”고 물었다. “옌자오(燕郊)로 간다”고 했다. “부지런히 돈 모아서 빨리 당신 집을 사는 게 최고”라는 ‘하나 마나 한’ 덕담을 한 뒤 돌아서려는데, 그 청년이 나를 향해 설핏 웃더니 이렇게 응수했다. “베이징에 내 집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 월급으로는 절대 베이징에 작은 집 한 채도 못 살걸요. 이제 옌자오로 가면 평생 거기서 못 나올지도 몰라요.”

쉬캉(27)도 주거난민이다. 14살에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와 음식점 등에서 일하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일했다. 최근에는 티베트 라싸에 정착해 6년 동안 식당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 쉬캉은 주로 식당에서 제공해주는 단체 기숙사나 여러 형태의 쪽방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그는 간절하게 자기 ‘집’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2019년 11월 인터넷에서 우연히 헤이룽장성 허강이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소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3만위안(약 540만원)밖에 안 한다는 글을 보았다. 쉬캉은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집을 샀다. 처음으로 이 지상에서 오직 자기에게만 속하는 ‘집’을 가지게 됐다. 거실과 방 한 칸이 있는 47㎡의 아주 작고 낡은 아파트였다. 그 집을 사기 전까지 허강이란 지명은 들어본 일이 없었다.

집값 잔금을 치르고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방산증’(집문서) 수속을 완료한 날, 허강에는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쉬캉은 ‘자기 집’ 창문에 서서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감격에 벅찼다.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집에서 그는 며칠을 지내다 다시 라싸로 돌아갔다. 비록 허강에 집을 샀지만 그곳의 임금수준이 형편없는데다 일자리도 마땅치 않아, 당분간 라싸에서 일해 돈을 좀더 모아 집을 고치는 비용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라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퍼져, 일자리였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 수입이 끊기고 급기야 통장에 0.59위안(약 100원)만 남자, 그는 집을 팔기로 했다. 더는 버틸 만한 ‘생존 비용’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쉬캉은 2월 말 허강의 집을 팔았다. 집은 2.2만위안에 거래됐다. “그 집을 사고 잠시나마 안정감이 생겼고, 어디를 가더라도 불안하지 않았다.” 쉬캉은 허강에 집을 사러 가던 때의 마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새벽 3시 기차에 올라 잠시 눈을 붙이며 허강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 순간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한 청년이 허강에 가서 3만위안 하는 집 한 채를 사서, 몇 개월 뒤 2.2만위안에 팔다’, <중국청년보> 7월9일치 기사 요약 정리)

옌자오로 오세요, 베이징 호구를 드려요

“나는 옌자오에 산다. 옌자오는 베이징이 아니라 허베이성 소속이다. 집값이 싸서 많은 사람이 여기로 와서 집을 사거나 세를 얻어 살고 있다. (…) 매년 설날에 고향에 돌아가면,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집도 사고, 너 참 잘 풀리는구나’라며 부러워한다. (…) 어느 날 회사 상사가 ‘어디 사냐’고 물어보기에 ‘옌자오에 산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웃으면서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가난한 집 자식이구먼! 내가 만일 옌자오에 산다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었을 거야.’ 그 말을 듣는 내 마음 한쪽이 저려왔다. (…)

모든 사람은 다 이 세상 위의 개미들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살아간다. 옌자오에 사는 나도 그 개미 중 한 명이다. 회사 동료 한 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넌 비록 옌자오일지라도 자기 집이 있잖아. 나처럼 대부분은 아직 집도 절도 없는 신세라고. 베이징에서 세 들어 사는 신세보다는 옌자오에 집을 가진 네가 훨씬 부러워.’ 하지만 인생은 비교 가능한 것이 아니다.”(류총총 블로그 글 ‘옌자오, 30만 명의 사람들이 마치 땅강아지와 개미처럼 베이징을 향해 기어 올라간다’ 중 요약 발췌)

베이징에 사는 수많은 ‘청년 쉬캉’은 허강 대신 옌자오로 간다. 옌자오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베이징과 맞붙은, 허베이성에 속하는 경제개발구 도시다. 2010년을 전후해 이 지역에, 우리나라 신도시와 비슷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옌자오를 관할하는 허베이성 정부에선 이 지역이 베이징과 마주 보고, 자가용으로 30분 정도면 베이징 중심가에 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대대적인 아파트 분양 마케팅을 했다. 가장 큰 주목을 끈 것은, 옌자오에 집을 사면 베이징 호구(주민등록지)를 준다는 홍보였다.(부동산 개발회사에서 홍보한 것으로 실제 정부 정책에는 그런 사항이 없었다.)

중국에서 호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베이징에 살면서 베이징 호구를 가지지 못하면 자녀 진학에 걸림돌이 되고, 의료보험과 양로보험 등 여러 사회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중국 내 일선 도시에서 해당 호구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옌자오에 집을 사면 베이징 호구를 주겠다고 하니, 너도나도 옌자오로 몰려갔다. 베이징 집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것도 매력 요인이었다.

특히 청년들이 옌자오로 몰려갔다. 베이징 외곽에 있던, 주거난민들의 집단 거주지 탕자링이 철거된 뒤 더 많은 사람이 옌자오로 갔다. 베이징에선 치솟는 집세와 물가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옌자오로 간 청년의 건투를 빈다

옌자오 집값은 투기꾼이 몰리면서 한동안 크게 올랐다가 지금은 곤두박질쳤다. 베이징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지만, 교통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들어가려면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서 신분증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베이징으로 출퇴근하려면 하루 서너 시간을 길에 쏟아야 한다. 옌자오에 집을 산 사람들도 주중엔 베이징 내 쪽방이나 회사 기숙사 등에서 지내다가 주말에만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다. 낮에는 도시 자체가 텅 빈다. 주목받던 신도시는 지금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투자 가치는 빛이 바랬고, 지금은 베이징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주거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9층에 사는 게슈타포는 최근 단체대화방에 아파트 가격을 담합하자는 ‘선동질’을 한다. 평당 얼마 이하로는 절대 내놓지 말라는 거다. 세 놓을 때도 세입자를 봐가며 임대하라고 한다. 세입자가 다니는 회사와 학력 정도, 어느 지역 출신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우리 아파트가 품위 있는 사람들의 거주지로 몸값이 올라간다고 했다. 나는 단체대화방에서 항상 손가락을 부르르 떨면서 이 말을 쓸까 말까 고민한다. ‘게슈타포! 당신만 이 아파트에서 사라지면 우리 아파트는 훨씬 더 품격 있는 공동체가 될 거야!’ 그나저나, 옌자오로 간 앞집 청년의 건투를 빈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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