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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이 세계의 현실, 이 세계의 공포로

뱀파이어와 신이 등장하는 또 다른 세계 <쇼리> <지옥>
등록 2020-07-20 13:19 수정 2020-07-22 00:43

코로나19 이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에 도착해서일까. 유독 또 다른 상상 세계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세계는 어떤가. SF(과학소설)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2005년 뱀파이어 소설 <쇼리>(프쉬케의숲 펴냄)와 연상호와 최규석의 만화 <지옥>(문학동네 펴냄)은 그런 이세계를, 현실에서 극도의 모순에 의문을 품고 창조해냈다.

두 작품은 모두 여과 없이 살육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쇼리> 첫 장면, 엄청난 허기와 고통 속에 깨어난 ‘나’는 살아 있는 것을 사냥하고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면서 움푹 파인 두개골을 비롯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 그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어가고 있다는 것, 낮의 햇볕을 견디기 어려워 땅굴을 파고 들어가 생활해야 한다는 것 등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다 비가 오는 날 도로에서 나를 발견하고 멈춘 차에 올라탄다. 운전사는 나를 10대 초반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허기가 지독했던 나는 그의 손과 목을 깨문다.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은 ‘뱀파이어’라고 부르고, 그들 스스로는 ‘이나’라고 부르는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이름이 ‘쇼리’라고 밝혀지는 소녀는 다른 전형적인 뱀파이어 종족과 달리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낮에 취약한 종적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실행하던 ‘유전자 개선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쇼리는 다른 뱀파이어들과 달리 낮에도 생활할 수 있는 ‘개선된 복합체’였고, 이 개선의 실체는 ‘멜라닌 색소’, 즉 검은 피부였다. 노예제 시대로 되돌아가는 흑인 여성 주인공의 타임슬립물 <킨> 등을 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지옥>도 지옥도로 출발한다. 카페에서 한 남자가 뭔가에 질린 듯 덜덜 떨며 앉아 있다. 곧 검은 괴물들이 나타나고 도망치지만 괴물들은 남자의 몸을 찢어발긴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 장면을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찍는다. 이 동영상을 배경으로 새진리교의 창시자인 남자가 설법을 펼친다. 인간의 악이 가득한 세상을 두고 보지 못한 신이 직접 징벌에 나섰음을 강조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 뒤에는 밝혀지지 않았을지라도 악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를 남자는 ‘시연’이라 한다. 시연 전 신은 죽는 날짜와 시간을 고지한다. 새진리교는 그 시간을 기다려 시연을 생방송한다. 곧 고지를 받은 이의 죄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세상은 신의 의지를 받드는 법정이 된다. 신의 의도를 곡학아세하는 현실 종교는, 신의 실체가 명백하게 드러난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신의 뜻을 오독한다. 새진리교의 세상이 된 상황을 그리는 2부는 현재 네이버 웹툰에 공개되고 있다. <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첫 동명 애니메이션(2003년)이 원본이다. 넷플릭스에서 <헬바운드>로 제작이 확정됐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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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김정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1만9800원

영국 런던시티대학의 ‘도시재생’ 연구자가 건축학·사회학·지리학·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런던의 경험과 시사점을 탐색한다. 런던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20세기까지 발전을 거듭했으나 그 부작용도 심각했다. 지금 런던의 새 화두는 ‘공공 공간’ ‘보행 중심’ 그리고 ‘시민’이다.

밤의 역사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김정하 옮김, 학과지성사 펴냄, 3만3천원

밤은 두려움과 은밀한 일탈의 세계다. 이탈리아 역사학자가 중세 기독교 유럽과 시베리아까지 유라시아의 샤머니즘과 설화, 민속문화에 나타난 ‘악마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의 여행에 관하여’(부제) 이야기한다. 나병환자·유대인·이슬람교도 등 소수자에 대한 박해는 밤의 이면이었다.

강철왕국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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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첫 통일왕국인 프로이센의 시초부터 공식 소멸(1600~1947)까지 격동의 중·근대사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자가 1056쪽(번역본)의 방대한 저작으로 되살려냈다.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독일제국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거쳐 나치의 제3제국을 잇는 대서사가 펼쳐진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8500원

마스크는 헐겁고 스마트폰은 자꾸 떨어뜨리고 에어컨을 켜면 춥다. 그렇게 느낀다면 당신은 여성이다. 산업 데이터가 남성을 중심으로 설계되기 때문에(디폴트값으로 설정) 우아한 전자기기를 다루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저자는 노동, 의료, 도시계획, 정치 등이 모두 그렇다고 데이터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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