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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김단야가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통해 폭로해 응징하려 한 ‘이자’
등록 2020-07-04 13:38 수정 2020-07-10 07:40
독고전,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 찍은 사진(왼쪽). 김명시, 1932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신문에 보도된 사진. 임경석 제공

독고전,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 찍은 사진(왼쪽). 김명시, 1932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신문에 보도된 사진.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기록관에서 발굴된 어느 문서에 한 인물의 정보가 쓰여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전설이라고도 할 김단야가 1937년 자필로 작성한 기밀문서에 말이다. 누군가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반일운동 역사에 관심 가진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인물이다.

이자는 1921년 당원으로 1925년에 당중앙 검사위원, 국경연락원으로 있던 자로서 4년 징역을 살고 나온 자이다. 그는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자이다.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있었는데….1

4년 수감 생활한 공산주의자는 누구인가

‘이자’란 누굴까? 일찍부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한 열렬한 투사였던 것 같다.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 경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3·1운동 직후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비밀결사의 중요 직책을 맡았다. 1925년에 주목해보자. 당 중앙간부로 국경연락원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1925년이란 바로 그해 4월17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염두에 둔 표현임이 틀림없다. 그 단체의 국경연락 임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을 찾아보면 ‘이자’가 누군지 단서를 잡을 수 있다.

1925년 12월 제1차 검거 사건이 터졌을 때, 국경지대에서 체포된 비밀결사 참가자는 셋이었다. <조선일보> 신의주 지국장이며 현지 사상단체 신인회 집행위원인 독고전(38), 신의주의 공개 청년단체인 국경청년동맹 간부 김경서(24), 국경 너머 중국 안동(오늘날 단둥)에 거주하는 조동근(30)이 그들이다. 이 중 4년간 징역살이를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따져보자. 셋 다 검거 초창기인 1925년 12월 초에 체포됐는데, 그중 김경서와 조동근은 1927년 4월 초 면소 조처로 출감했다. 두 사람의 수감 기간은 1년5개월가량이다. 독고전은 어땠나? 그가 출옥한 때는 1929년 8월이었다. 요컨대 그의 수감 기간은 3년9개월이다.

그렇다. 앞 인용문에서 말하는 ‘이자’란 곧 독고전(獨孤佺)이었다. ‘독고’는 성이고 ‘전’이 이름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국경연락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고, 조동근은 그의 지휘 아래 압록강 너머 안동현에 체류하는 현지 담당자였다.2 “1921년 당원”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바로 그때부터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는 뜻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가 태동하던 초창기였다. ‘당’에 가입했다는데, 그 시기 과연 어떤 단체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공산당이었다. 1921년 5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설립된,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바로 그것이었다. 뒷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이나, 대한민국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시현 등이 이때 독고전과 더불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동료였다.

말하자면 독고전은 조선 사회주의운동 초창기를 개척한 1세대 멤버였다. 그의 운동 경력은 화려하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그해 10월 자바이칼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도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했다. 그뿐이랴.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이 국내로 이전된 뒤에도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1925년 4월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출석한 19명의 대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스크바, 시베리아, 경성, 신의주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연구자 이준식의 평가에 따르면,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3

김명시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 신상조사서. 러시아식 이름은 ‘스베틸로바’이고, 1907년 2월15일생이며, 일본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으며, ‘경남 마산 189’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소상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김명시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 신상조사서. 러시아식 이름은 ‘스베틸로바’이고, 1907년 2월15일생이며, 일본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으며, ‘경남 마산 189’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소상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

긴 옥고를 치른 뒤에도 그의 정체성은 변함없었다. 머잖아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출옥 뒤 1년6개월쯤 지나 다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앞 인용문에 따르면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일하게 됐다. 상해에서 발간한 기관지란 <콤무니스트>를 가리킨다. 이 잡지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 자격을 취소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설립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기관지였다. 이른바 ‘국제선’이라고 하던, 1930년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류라고 칭해도 좋을 대표적인 공산주의 그룹이었다.4 이 그룹은 1932년 여름까지 국내에 20개 미만의 야체이카(세포단체)와 90여 명의 비밀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고전이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경연락을 주관한 때는 1931년 5월부터였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압록강 하구의 삼엄한 국경 경비망을 뚫고, 사람과 물자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다. <콤무니스트> 창간호와 제2·3호 합병호, 제4호가 이 경로로 국내 각 야체이카에 전달됐다. 김형선, 김명시 등을 비롯한 국내 공작 책임자들이 오갔다. ‘이 거점의 노련한 비합법 연계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그의 활동상은 빈틈이 없었다.

앞서 소개한 기밀문서를 다시 들여다보자. 독고전에 관한 소개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1932년에 그자가 우리 동무를 잡아준 사실(그와 서울연락원 사이에 쓰는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주어서 서울서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잡혔다)을 들어, 밀정이란 것을 내가 우리 기관지 <콤무니스트>(Коммунист)에다가 폭로했다.

문장이 복문인데다 괄호 안에 보충 설명까지 하다보니 문맥이 복잡하다. 낱낱이 풀어보자. 1932년 독고전이 ‘우리 동무’를 경찰에 붙잡히게 했다.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건네주었고, 그 탓에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체포됐다. 김단야는 그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그 사실을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폭로했다는 내용이다.

독고전이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정보다. 그가 비밀접선 정보를 일본 형사에게 넘겨준 탓에 약속 장소에 나갔던 동지가 체포됐다고 한다. 이때 체포된 ‘동무’는 누구인가?

인쇄 거점이 털리고 동지들 하나둘 검거돼

김명시(金命時)였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뛰어든 25살 여성, 기나긴 옥고를 겪은 뒤에도 굴하지 않고 외국에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거인이었다.

김명시가 국경연락 책임자 독고전의 배신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록은 그의 동지이자 친오빠인 김형선의 활동 보고서에 쓰여 있다. 그에 따르면 독고전은 비밀접선 암호를 경찰에게 알려주는 방법으로 동료들을 팔아넘겼다고 한다. 두 번이나 그랬다. 한 번은 서울에서 김형선을 노렸고, 또 한 번은 압록강 건너편 안동에서 김명시를 노렸다는 것이다. 김형선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으나, 김명시는 그만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다.5

1931~32년 김명시는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파견원으로서 인천을 거점 삼아 지하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메이데이(5월1일) 기념투쟁 때 살포한 격문이 문제가 됐다.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거점이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인쇄 거점도 털리고,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중이었다. 김명시는 국외 탈출을 결심했다. 신의주의 국경연락 거점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할 작정이었다.

뒷날 김명시가 남긴 회고담이 있다.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무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5월1일 노동절에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김명시는 이때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5살부터 32살까지 옥중에서 지내야 했다. 젊은 여성의 꽃다운 시절이었다. 회한에 찬 그의 표현을 들어보자.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독고전의 배신은 동지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었을 뿐 아니라, 국제선 공산그룹의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비밀조직 구성원이 대거 체포됐고, 국경을 통해 이뤄지던 국내외 연락이 더는 불가능하게 됐다.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던 당 재건 운동은 침체에 빠졌다. 독립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할 것 없이 인간의 이념적·조직적 운동은 내부자의 배신과 변절로 쇠락하는 일이 많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동지가 적의 편으로 넘어갔을 때, 송두리째 몰락하는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밀정 행위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독고전은 도대체 왜 배신했을까. 밀정 행위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일신의 안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큰돈을 벌고 싶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독고전의 이후 행적도 암흑 속에 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았는지, 그의 범죄행위는 상응하는 업보를 받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김단야는 분노했다. 일제의 밀정으로 전락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면을 통해 독고전이 혁명의 대의를 배신하고서, 동지를 경찰에게 팔아넘기고 있음을 동지들 사이에 널리 폭로했다고 한다. <콤무니스트>는 창간호부터 제7호까지 발간됐다. 그중 제2호와 제3호는 합병호로 나왔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섯 번 간행됐다. 이 중 코민테른기록관에 보존된 것은 네 개호다. 제5호와 제7호가 빠져 있다. 현존하는 텍스트 속에는 김단야가 말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폭로하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결락된 그 두 호 중 하나에 담겼을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경로’, 13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1937년 2월23일
2.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부 앞), с.2,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1926년 1월31일
3.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독립기념관, 72쪽, 2009년
4. 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년
5. Kimdanya, Report on the publication of journal “Communist” for Korea, pp.13-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94, 1934년 2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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