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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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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절망의 산에서 지팡이가 되어주다

중국인에게 스톄성의 사색기로 기억되는 디탄공원
등록 2020-07-04 13:32 수정 2020-07-09 00:56
2020년 베이징 디탄공원. 마스크를 한 시민이 잡지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베이징 디탄공원. 마스크를 한 시민이 잡지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그해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거의 매일, 톈진의 집 근처 공원을 배회했다. 어학연수를 하던 대학교의 연수 동기들이 모두 귀국하자 외로움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한데다 대학교 어학당에 낼 학비도 부족해서, 학교 대신 공원으로 출퇴근했다. 공원 안을 어슬렁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것도 지겨우면 호숫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밑에 앉아 중국어책을 펼쳐 들고 매일 똑같은 페이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해거름 무렵 다시 쓸쓸한 집에 돌아와 달걀볶음밥을 해서 먹었다.

<홍루몽> 속 그 남자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도 내가 좋아하던 호숫가 수양버들 근처 벤치에 앉아서 매일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어떤 날은 가끔 혼잣말처럼 조용히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그가 읽는 책이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기에, 바로 옆자리에서 매일 힐끔거리며 자신을 관찰하는 낯선 여인에게 눈길 한번 건네주지 않는지. 수양버들이 바람에 산들거릴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담쓰담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남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우아한 손짓으로 책장을 지그시 눌렀다. 나는 그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나뭇잎이 우수수 다 떨어졌을 때, 나는 그와 사귀기로 결심했다. 초보 중국어를 하는 외국인인데다 여자라서 의외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에게 중국인 남자친구가 생길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모르는 문장을 만난 외국 여성이 마침 옆에 앉아 있는 ‘지식 청년’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물어보며 사귀게 된다는 게 ‘작전 시나리오’였다.

“저… 잠시만 실례해도 될까요? 제가 뭐 좀….”

드디어 남자에게 역사적인 ‘말 걸기’를 시도했다. 잠시 뒤, 그를 향한 나의 기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산산조각이 났다. “나 지금 아주 바빠요. 말 시키지 마세요!”

그의 우아했던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뿔테 안경을 올려 잡았다. 정열적으로 책을 읽던 반짝이는 두 눈은 어느새 성깔 있는 사나운 눈매로 변해 있었다. 남자의 예상 밖 반응에 움찔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마침 개 한 마리를 끌고 산책하는 아줌마가 앞으로 지나갔고, 또 마침 해 질 녘이라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달걀볶음밥을 해먹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남자에게 황급히 “아, 죄송합니다. 짜이젠!(다음에 봐요)”이라고 말한 뒤, 질문하기 위해 밑줄까지 친 중국어책을 들고 어둑해지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날 나는 남자가 탐독하던 책 제목을 보았다. <홍루몽>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공원에 다시는 가지 않았고, 그를 ‘다시 볼’ 일도 없었다. 이후 더는 외로울 시간도 없었다. 곧바로 베이징으로 이사했고, 이래저래 사는 일로 바쁘고 고단했다.

스톄성이 몰두한 ‘죽는 일’

20대 청년이던, 당시는 무명의 백수였던, 스톄성도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매일 집 근처 공원을 배회했다. 스톄성은 2010년 작고한, 중국 현대 소설가이자 희곡작가, 산문가다. 그는 중국에서 아름다운 현대 산문으로 손꼽히는 <나와 디탄>의 작가로 유명하다.

스톄성은 스무 살에 두 다리가 마비돼 평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살았다. 문화대혁명(문혁)이 한창이던 1969년, 십 대 후반에 산시성 옌안 지역으로 가서 하방생활(문혁 기간에 농촌 현실을 알고 농민에게서 혁명사상을 배우게 한다는 미명 아래 수많은 도시 청년을 농촌에 보내 생활하게 한 사회정치 운동)을 했다. 그때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양떼를 몰고 나갔다가 산 정상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한 달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열병을 앓은 뒤,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막 이십 대에 접어들던,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에 시작된 불행이었다.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그를 맞아준 곳이 바로 디탄(地檀)공원이다.

“15년 전 어느 날 오후, 나는 휠체어를 밀며 디탄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디탄은 정신과 영혼의 넋이 나가 있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잘 준비해놓고 있었다. (…)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지 못했고, 가야 할 길도 찾지 못했다. 별안간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된 나는 휠체어를 밀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하나의 세계에서 도망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였다.”(스톄성, <나와 디탄> 중)

두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삶의 의미도 상실해버린 스톄성이 디탄공원 어느 모퉁이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고 매일같이 몰두한 생각은 ‘죽는 일’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휠체어를 밀고 디탄공원에 와서 우두커니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고, 나는 왜 태어났나’라는 생각만 몇 년 동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다. “태어나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일로,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실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기 때문에 다급하게 갈망할 필요는 없다. 죽음은 반드시 맞게 되는 기념일이다.” 그에게 남은 문제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다.

날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만 골몰하던 스톄성이 ‘글을 쓰고 살면서’ 자신의 불행한 운명과 화해하기로 작정한 가장 큰 동력은 디탄공원이었다. 디탄공원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과, 사시사철 피고 지고 시들다 다시 열매를 맺고 싹을 틔우는, 공원 내 자연 풍경의 변화를 수년간 지켜보면서 그의 슬픔과 절망도 차츰 치유됐다. 스톄성은 “디탄공원 덕분에 나는 자주 내 운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주

스톄성의 친구 한 명도 디탄공원에 출근 도장을 찍는 고정 멤버였다. 그 역시 문혁 때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정치범으로 몇 년간 옥살이하고 나온, 불운한 친구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 정치범 경력 때문에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막노동하며 살아가던 친구는 스톄성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울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공원을 매일 빙빙 스무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뛰다보니 그는 거의 마라톤 선수급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마라톤으로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정치적 해방’을 얻기로 결심했다. 베이징 마라톤 대회에서 10위 안에 든 사람들 사진과 명단이 대로변 신문 진열창에 걸려 있는 것을 본 뒤, 자신도 그 명단에 끼면 정치적 신분 해방을 얻으리라고 기대했다.

각고의 연습과 노력 끝에 친구는 두 번째 해에 4등을 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과 명단은 3등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다음해, 7등을 했다. 그해 신문에는 6등까지 한 사람들의 사진과 명단이 실렸다. 그는 자신을 탓하며 더 열심히 해서 또 다음해 마라톤에선 3등을 했다. 당시 신문에는 1등을 한 사람만 사진과 이름이 실렸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친구는 드디어 1등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그는 끝내 절망하고 말았다. 1등을 한 자신의 사진과 이름 대신, 신문에는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군중의 사진만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제야 친구는 모든 것이 자신을 제외하기로 결정한 ‘정치적 고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 친구와 스톄성은 함께 자주 디탄공원을 배회하며 세상에 온갖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다가 날이 어둑해져서야 헤어지곤 했다. 그래도 헤어질 때는 서로를 걱정하며 이렇게 당부했다. “절대 먼저 죽으면 안 돼. 다시 잘 살아보도록 하자!”

그 불운했던 친구는, 38살에 참가한 마지막 마라톤 대회에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다시 1등을 했다. 그는 끝내 ‘정치적 신분 해방’은 얻지 못했지만,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주에서는 정신적 해방을 이룬 셈이다.

스톄성이 디탄공원에서 마주친 사람 가운데 자신의 어머니도 있다. 아들이 혹여 ‘나쁜 생각’을 할까봐, 매일 몰래 아들 뒤를 따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디탄공원 어딘가에서 안전하게 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뒷모습을 보이며 서서히 사라졌다. 자신을 찾아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구석에서 지켜보며 스톄성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공원 안 내 휠체어 바큇자국이 있던 모든 곳에는 어머니의 발자국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휠체어 바큇자국 뒤 어머니 발자국도

디탄공원은 명나라 1530년에 세워졌다. 명·청 시대에 황제가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 있던 곳이다. 2006년부터 전국중요문화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베이징의 공원 명소 중 한 곳이다. 가을마다 열리는 디탄공원 도서 축제와 은행나무길 축제는 베이징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연례행사다. 하지만 베이징 시민들에게 디탄공원은 스톄성의 <나와 디탄>으로 더 애틋한 곳이다.

스톄성이 기록한 15년간의 디탄공원 사색기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절망과 희망의 기록이자, 그 시절 스톄성과 더불어 공원 안을 오가던 수많은 중국인을 축소해 그린 소묘화다. 그곳에서 스톄성은 자신이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작가가 되었다. 디탄공원은 절망한 스톄성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희망의 화두를 던져줬고, 그 절망의 산에서 내려갈 때 짚고 가는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오래전, 내가 매일 배회하던 톈진의 공원에서 <홍루몽>을 열독하던 남자도 나에게는 지팡이 같은 은인이다. 한 시절 그를 몰래 짝사랑하며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공원을 오가는 사이, 내 외로움도 서서히 삭여갔기 때문이다. 나중에 베이징에서 만난, 나의 진짜 ‘중국인 남친’이 된, 지금의 남편에게 언젠가 그 남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편은 아주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을 했다. “<홍루몽>이 아주 야한 소설인 거 알고 있지? 아마 그 남자가 가장 뜨거운 부분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겠지. 그도 분명히 매일 그 공원에 출몰하는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어디 그 <홍루몽>에 나오는 수많은 아름답고 요염한 여인네의 매력을 능가할 수 있겠어?”

그 남자는 아직도 그 공원에서 <홍루몽>에 정신이 빠진 채 늙어가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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