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역사 속 공간] 이 좋은 풍광에 피비린 역사가

문화재 재지정 논란 성락원-국가문화재로 승격되는 석파정,
두 별서에는 대원군-명성황후의 비극적 권력투쟁이 서려
등록 2020-07-04 06:20 수정 2020-07-08 02:03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은 판서 조정만, 영의정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소유했던 별서로 서울에 남아 있는 최고의 별서로 꼽힌다. 박승화 기자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은 판서 조정만, 영의정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소유했던 별서로 서울에 남아 있는 최고의 별서로 꼽힌다. 박승화 기자

지난 5월6일 유니온약품그룹의 석파문화원서울미술관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26호인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을 국가문화재로 승격시키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곳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조정만이 처음 별서(교외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로 조성한 곳이다. 석파정 들머리의 바위에 새긴 ‘소수운렴암’(巢水雲簾庵)이란 글씨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조정만에게 써준 것이다. ‘물이 깃들이고 구름 발을 드리운 집’이란 뜻이다.

시작은 1866년 음력 정월 초하루 금혼령

현재의 별서는 주로 19세기 중후반 영의정 김흥근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당대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신안동) 김씨 김흥근의 ‘삼계동산정’(三溪洞山亭)을, 아들을 왕위에 올린 이하응이 1864년 빼앗아 ‘석파산장’(石坡山莊)으로 바꾼 일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극적인 권력 이동을 상징한다. 사랑채 위쪽 바위에 새긴 ‘삼계동’은 ‘세 시냇물골’이란 뜻으로 현재 부암동의 옛 지명이며, 석파는 ‘돌언덕’이란 뜻으로 석파정이 들어선 거대한 바위언덕을 말한다. 이하응의 호 석파가 여기서 나왔다.

또 6월24일 문화재청은 지정 근거가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난 국가문화재 명승 35호 서울 성북동 ‘성락원’(城樂園)의 지정을 해제하고, 이곳을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애초 성락원은 조선 철종 때 판서 심상응의 별서로 알려졌으나, 최근 문화재청 조사에서 조선 고종 때 내시 황윤명의 별서인 ‘쌍류동천’(雙流洞天) 또는 ‘쌍괴당’(雙槐堂)으로 확인됐다. 쌍류동천은 ‘두 물줄기골’이란 뜻이고, 쌍괴당은 ‘두 홰나무집’이란 뜻이다. 특히 이곳은 1884년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 민자영과 세자 이척(순종) 등이 피신했던 곳으로 새로 확인됐다.

이들 별서는 19세기 말 극단적인 권력투쟁을 벌여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이하응과 민자영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특히 서울에 남아 있는 최고의 별서로 평가받는 석파정이 197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반면, 역사적 근거가 거짓이었던 성락원이 1992년 사적, 2008년 명승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일은 문화재 관리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최근 석파정이 국가문화재로 재지정이 추진되고 성락원은 해제, 재지정되는 일이 당대에도 부침이 심했던 두 사람의 삶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들 사이의 비극적 대결은 1866년 음력 정월 초하루,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조선의 모든 12~17살 미혼 여성에게 금혼령을 내린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 14살이던 고종 이재황의 왕비를 찾겠다는 발표였다. 이 간택엔 당대 대표적 권력 가문의 딸들이 모두 참여했고, 결국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 민자영이 뽑혔다.

서울 성북동 ‘성락원’은 내시 황윤명의 별서로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 민자영이 피신했던 곳이다. 한겨레 자료

서울 성북동 ‘성락원’은 내시 황윤명의 별서로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 민자영이 피신했던 곳이다. 한겨레 자료


권력투쟁 와중에 외세 끌어들여

사실 민자영을 왕비로 선택한 것은 이하응으로 알려졌다. 이하응이 민자영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하응의 어머니와 아내가 여흥 민씨였기 때문이다. 또 민자영에게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 등 살아 있는 남자 친족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민자영의 양오빠인 민승호는 이하응의 처남이기도 했다. 장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오산이었다. 시아버지 이하응과 며느리 민자영의 권력투쟁은 1873년 21살이 된 이재황이 아버지의 대리통치를 거부하고 직접통치를 선언하자마자 시작됐다.

이하응의 반격은 매우 거칠었다. 1873년 민자영의 경복궁 침전에서 폭탄이 터졌다. 민자영은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1874년엔 민자영의 양오빠이자 최측근인 민승호의 집에 폭탄이 배달됐다. 민자영의 친어머니와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등 3명이 숨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

1881년 이재황의 배다른 형 이재선이 역모 혐의로 사형됐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뒤 찾아가자 이하응은 창덕궁으로 가서 민자영을 잡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하응이 청군에 잡혀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때 처음 청과 일본의 군대가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1884년 갑신정변 때도 김옥균이 발표한 정강 가운데 제1조가 ‘대원군을 (청에서) 즉각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하응은 1885년 큰아들인 이재면을, 1886년엔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다가 실패했다. 이하응은 둘째 아들 부부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세 차례나 쿠데타를 모의하고도 살아남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하응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일본과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과도 손잡았다. 1895년 일본군이 청군을 격파하자 민자영과 이재황은 러시아 쪽에 붙었다. 그러자 일본은 한밤에 군대와 깡패를 동원해 경복궁에서 민자영을 살해했다(을미사변). 그날 아침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와 함께 경복궁에 들어가 권력을 내놓으라고 이재황을 협박한 사람이 이하응이었다.

민자영은 살았을 때 민중에게 사랑받는 왕비가 아니었다. 그러나 민자영이 비극적으로 죽자 상황이 뒤집혔다. 왕비를 죽인 일본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경쟁자는 사라졌지만, 이하응은 권력을 잡을 수 없었다. 민자영이 죽고 나서야 이하응은 자신의 진짜 적이 일본 등 외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불과 3년 뒤 이하응도 용산방 공덕리(마포구 공덕동) 아소정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비스마르크와 같은 점 다른 점

이하응이 ‘대원위’에 오른 1863년보다 1년 전,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에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수상’에 올랐다. 그는 프로이센의 군대와 관료를 근대화하고, 오스트리아·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1871년 독일인들의 오랜 꿈인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1890년까지 독일 수상으로 일하면서 능란한 외교와 내정으로 독일을 유럽의 중심에 세웠다. 비스마르크는 이하응과 같은 해인 1898년 죽었다.

이하응이나 민자영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1863년 집권 뒤 이하응은 고른 인재 등용, 서원 1천여 개 폐지, 환곡 개혁, 호포제 실시, 토지개혁 등으로 백성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민자영도 온건한 개화와 외교를 통한 독립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하응과 민자영에겐 비스마르크처럼 개방과 근대화에 나설 안목과 용기, 전쟁과 외교를 병행할 힘과 지혜가 없었다. 특히 이하응과 민자영의 끝없는 권력투쟁은 집권 자체가 목적인 정치가 어떻게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는지를 잘 보여줬다. 석파정과 성락원을 단순히 경치 좋은 별서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영주 국회의원, ‘성락원 명승 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 자료집, 2019
문화재청, ‘2018년 별서정원 명승자원조사’, 2018
조민기, <조선의 권력자들>, 책비, 2020
위키피디아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