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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박열 동지 김중한, ‘모욕적 죽음, 비극적 망각’

등록 2020-06-16 14:33 수정 2020-06-18 01:26
1927년 2월24일 경성에서 언론 인터뷰 때의 김중한(왼쪽). 1934년 1월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치보위부 심문을 받을 당시 초췌한 모습을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1927년 2월24일 경성에서 언론 인터뷰 때의 김중한(왼쪽). 1934년 1월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치보위부 심문을 받을 당시 초췌한 모습을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스탈린 집정 시기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 가운데 ‘유동식’이란 조선 사람이 있다. 일본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는 망명자였다. 그는 1933년 5월14일 체포당해 1년간이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는 끝내 자유를 얻지 못했다. 유죄로 간주된 그에게 극형이 선고됐다. 그리하여 1934년 5월21일 결국 총살되고 말았다. 향년 33살이었다.

유동식의 혐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행위를 범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근거가 있는 것일까? 소련 오게페우(통합국가정치보위부) 심문관들은 유동식이 적성국가인 일본 영토를 빈번하게 왕래한 점을 문제 삼았다. 소련 정부나 코민테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으로 오갔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안내하여 불법 월경을 방조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조선·소련·중국 국경 지대에 직업을 구해 장기간 체재한 사실도 문제였다. 그는 국경에서 불과 25㎞ 떨어진, 연해주 포시예트 지구의 얀치헤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 행위는 스파이 활동의 편의를 얻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고 의심을 샀다.

1923년 ‘박열 사건’ 공범인 아나키스트

단지 혼자만 혐의를 받은 게 아니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오랫동안 교제한 사람들도 속속 체포됐다. 그들도 유동식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스파이이거나, 스파이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지, 동료들까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탄압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사람, 유동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의 본명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이었다. 세칭 ‘박열(朴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 천지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 김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중한은 일왕 암살을 음모한 박열로부터 폭탄 구매를 요청받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는 혐의로,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받았다. ‘대역 범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법관의 판단에 따라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죄’로 분리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중한의 주검이 묻힌 모스크바 서북쪽 교외 바간코보 묘지 정문. 임경석 제공

김중한의 주검이 묻힌 모스크바 서북쪽 교외 바간코보 묘지 정문. 임경석 제공


출옥 뒤 사회주의 강연 연사로

1927년 2월5일 김중한이 출옥했다. 체포된 지 3년5개월 만이었다. 도쿄 서북부 외곽에 위치한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노출됐다. 그의 동정이 신문지상에 널리 보도됐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천황 폐하’의 신변을 위협한 흉악한 범죄자를 고작 몇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보내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법률이 범죄자를 응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언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출옥 뒤 요코하마 지인 집에서 머물던 김중한도 이 소문을 접했다. 그를 살해하려고 자객을 밀파했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틀 만에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귀국길에 올랐다.

경성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달랐다. 비록 일본의 식민지이긴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조선어로 간행되는 신문사 두 곳의 기자들이 그가 머무는 시내 중심지 한 여관을 찾았다.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검정 모직 양복을 입고 안경을 낀 모습이었고, 매우 이지적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오랜 철창생활을 겪은 뒤인데도 조금도 초췌한 빛이 없이 도리어 씩씩한 기운이 넘치는 태도였다고 한다.1

옥중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이 질문을 듣고서 그는 자신의 독서와 사유 체험에 관해서 얘기했다. 심리·윤리·문학·생물학 등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원시 인류의 생활 상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마 그때를 억압과 차별, 계급, 착취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시기로 상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도 주목할 만하다. 인생의 본질, 해방, 삶의 가치, 자기 파멸, 비애, 전투 등의 어휘가 그의 내면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이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인생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되 승리를 기약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비애감에 굴복되지 않고 계속 전투해나가겠다고 말했다.2 이어서 “좀더 사색하고 좀더 연구하여, 이제부터는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두륵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대동강 입구의 항구도시 진남포에 이웃한 비옥한 농촌지대였다. 자택에서의 정양 기간은 길지 않았다. 김중한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신문 지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남포를 무대로 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진우청년회라는 청년단체가 그의 거점이었다. 이 청년단체는 마르크스 사후 41주년을 맞이해 사회주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4명의 연사 가운데 김중한의 이름이 있었다. 수년 전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던 김중한이 아나키스트 진영을 떠나 마르크스주의 진영으로 몸을 옮기는 중이었다. ‘좀더 가치 있는 일’이란 곧 그에게는 사회주의운동을 뜻했던 것 같다. 뒷날 김중한이 직접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면, “나는 이병화, 양명 등 그곳에 있던 조선공산당 엠엘파와 연결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3 출옥 이후 머지않아 김중한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김중한은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청년운동 확장과 사회단체 연대 운동에 힘을 쏟았다. 보기를 들면 진남포 일원의 각종 청년단체를 결속해 진남포시 단일청년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또 재만동포옹호 동맹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22개 사회단체를 결속한 연합 단체였다. 평안도 일대 사회운동단체들의 연대활동에도 뛰어들었다. 평남 안주에서 열린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했고, 그 대회의 단상에 올라 축사를 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진남포 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의 반열에 올랐다. 정치연구부 총무간사가 그의 직함이었다. 지회를 이끌고 가는 4인 집행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2년 동안 여섯 번이나 구금·가택수색

김중한의 활동 반경과 내용은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랐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적대시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은 이때 옛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절연했던 것 같다. 동향 출신의 아나키스트 최갑룡은 김중한이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해 축사한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고 회고했다.4

김중한은 신간회 중앙기관에도 진출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진남포구 대표위원으로 참석했다. ‘복대표’란 소수의 참석 인원만으로도 전국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끔, 각 지회에서 선출된 대표 가운데서 다시 대표위원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복대표는 전국에 걸쳐 34명이었는데, 그중에는 허헌(경성구), 황상규(양산구), 이주연(단천구) 등과 같이 집행부를 담당하게 될 저명 인사가 포진해 있었다. 진남포구를 대표하는 김중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경찰에게는 김중한의 활발한 사회운동 행위가 눈엣가시였다. ‘대역사건’ 연루자가 근신하기는커녕 대중 선동에 열성을 보이다니, 가만둘 수 없었다. 사소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검속·구금했다. 그 탓에 김중한은 체포와 훈방을 뻔질나게 되풀이해야만 했다. 낱낱이 꼽아보자.

1927년 8월 현지 관련 유력자와의 알력으로 인한 가택침입죄 사건으로 진남포경찰서에서 10일간 구금됐고, 그해 10월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서 불온한 내용의 축사를 했다는 혐의로 안주경찰서에서 6일간 구금당했으며, 1928년 5월에는 진남포경찰서의 갑작스러운 가택수색을 겪었고, 11월에는 신간회 지회 활동의 불온 혐의로 진남포경찰서에 9일간 구금당했다.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참가하던 중 경성종로경찰서에 며칠 구금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8월 공산주의비밀결사 연루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이틀간 구금당했다. 2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6회에 걸쳐 태클을 당했다.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탈출’, 그의 해외 탈출을 보도하는 1929년 9월9일치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진남포 사회운동의 맹장으로 고투 중이던 김중한이 최근에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기사였다.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던 진남포를 비롯한 인근의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고, 그의 거취를 엄중하게 뒤쫓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자는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만주 길림 방면으로 사라졌는데,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 가담한 것 같다는 추측 기사를 썼다.5

아직도 모스크바 묘지에 외로이

기자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길림 방면으로 잠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민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김중한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곳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의 비밀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했다. 이른바 ‘서상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강력한 단체였다. 서상파에 가담한 계기는 그 지도자 윤자영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그의 식견과 삶에 대해 내면의 공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말하면 28살부터 33살까지 김중한의 생애 마지막 삶은 망명지에서 이뤄졌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피억압 민족의 해방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다. 파란이 중첩한 그 구체적인 행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달리 추적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의 죽음은 이중의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인간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이름으로 단죄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그 비틀림과 망각이 무려 85년이나 계속됐다는 점이다. 정의를 위한 헌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잊힌 채 방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슬프다.

처형된 김중한의 주검은 모스크바 서북쪽 외곽지대에 있는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청년 시절에 그가 꿈꿨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해방을 위한 전투를 쉼 없이 계속했으나 도중에 스러지고 만 외로운 영혼이 거기에 지금도 묻혀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입경’, <조선일보> 1927. 2.25.
2. ‘박열 공범자 金重漢씨 입경’, <동아일보> 1927. 2.25.
3.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유동식(김중한) 심문조서’, 1934. 1.13.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독립기념관, 765쪽, 2019년.
4.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아나키즘운동사>, 선인, 317쪽, 2005년.
5. ‘박열 사건 공범 金重漢씨 탈주’, <동아일보> 1929.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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