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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역사] 인류는 ‘질병 공동체’ ②

[코로나 뉴노멀]
3부 - 감염병의 역사
등록 2020-05-30 06:17 수정 2020-06-13 04:42
감염병 치료에는 치료제와 백신뿐만 아니라 위생 습관 등의 행동 통제, 공중보건 시스템 구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2020년 5월20일 첫 등교수업을 한 고3 학생이 손세정제를 쓰고 있다. 류우종 기자

감염병 치료에는 치료제와 백신뿐만 아니라 위생 습관 등의 행동 통제, 공중보건 시스템 구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2020년 5월20일 첫 등교수업을 한 고3 학생이 손세정제를 쓰고 있다. 류우종 기자


* [감염병 역사]인류는 '질병 공동체' ①에서 이어집니다.


감염병의 새로운 전기, 에이즈

면역력에 대한 관심은 인종주의적 상상력과 쉽게 결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 결핵 사망률이 점차 줄었다. 그 원인에 관해서는 현재도 논쟁 중이다. 반면 아프리카나 태평양 군도 등 식민국가에서는 여전히 높은 결핵 이환율을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이른바 문명국가에서 거치는 질병으로 ‘문명병’이라는 별명이 결핵에 붙여졌다. 아프리카 등 식민국가는 결핵에 노출된 적이 없는 ‘처녀지’라고 명명됐다. 구대륙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침범한 뒤 천연두를 비롯한 질병이 유행하고 신대륙 인구가 감소한 것을 설명하는 데 유사한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구대륙의 질병에 대해 신대륙은 상대적으로 ‘처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노동착취와 지대 박탈로 인한 영양 결핍 등 질병 유행의 사회경제적 요소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에이즈)이 생기면서 감염병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백신 개발, 항생제 등 치료제 개발, 의술 발전으로 감염병은 현대의학에서 이미 정복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에이즈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발병하면서 힘을 잃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1983년 검출됐으나 정부는 1987년에야 공식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에이즈가 ‘게이 괴질’로 치부되며 감염자는 낙인찍히고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다. 1982년 이미 에이즈가 게이들만의 질환이 아님이 밝혀졌으나, 마약중독자 사이에 유행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회로부터 낙인화되고 주변화된 집단의 질환으로 치부됐다. 이런 반응은 이성애자 혈우병 환자가 헌혈로 에이즈에 걸렸음이 알려지고 사회적 공포가 불거졌을 때와는 달랐다.

1987년 전세계 에이즈 감염과 그로 인한 사망의 85%가 아프리카 사하라 남부 지방에 집중됐음이 드러나면서 에이즈 퇴치를 위한 글로벌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의학사가 앨런 브랜트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AIDS의 유행이 기존 전통적 국제보건(International Health)을 글로벌보건(Global Health)으로 바꾸었다고 평한다. 하나는 현존하는 위험 앞에서 공중보건과 치료, 그리고 임상연구 사이 전통적 구분이 허물어졌다는 점이다. 단지 격리나 예방, 차단이 아닌 환자를 살리는 치료가 공중보건적 이익이 크다는 것이 드러났다. 다른 하나는 에이즈 환자 권리 옹호 그룹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환자 권리 운동이 새로운 치료의 등장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환자 권리 운동은 공중보건에서 인권 존중의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HIV/AIDS는 전통적인 자유권을 제한하는 격리, 검역, 의무적 검사 등 공중보건적 조처를 재차 도입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공중의 이익 사이 갈등을 재소환했다. 이 갈등은 인권 기반 접근이 공중보건에서 중요성이 역설되면서 전환됐다. HIV/AIDS 경험은 감염자와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겠다는 접근이 감염병을 다루고 사회를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국가 주권과 안보의 문제로

감염인과 환자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공중의 이익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HIV/AIDS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핵도 여전히 심각하게 공중보건에 위협이 되며, 환자를 낙인화하지 않으면서 전파를 차단할 방법을 주요한 대응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결핵은 오늘날 잊힌 과거의 질병으로 간주되며 사회적 공포는 새로운 감염병, 이른바 ‘신종감염병’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기존에 알려진 위험보다 새로운 미지의 위험에 공포를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부가 새로운 위험을 국가 차원의 위험으로 간주하고 안보 문제로 의제화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이는 감염병과 그것을 둘러싼 위험이 국가 주권과 안보의 문제로 확대됐음을 뜻한다.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등장은 신종감염병이 국제적 보건안보 문제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신종감염병이란 단어는 HIV/AIDS 때부터 등장했으며 과학자들은 1990년대 미지의 미생물이 국가 보건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진지하게 논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발달한 이동수단과 메가시티(인구 1천만 명 이상의 거대 도시)화, 국제적 노동분업은 바이러스를 비롯한 감염성 물질이 빠르게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높은 이동성은 높은 유동성과 취약성을 만들어낸다. 미지의 감염병 등장은 각국이 알려진 감염병 발발을 보고하고 대응하는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 어떤 증상이나 증후라도 감염병 사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일단 발병하면 그 영향을 빠르게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우려의 근거였다.

WHO는 새로운 감염병 사태에 맞게 국제보건규칙을 개정함으로써 대응하려 했다. 새로운 국제보건규칙에 따르면 각국은 공중보건 위기에 걸맞은 대응 계획을 세워야 하고, 아직 ‘질병’으로 명명되기 어려운 일련의 증상이 생기더라도 이를 국제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국제사회에 정보를 제공할 권리는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스의 경우 정보 불투명성이 큰 문제가 되었다. 더 많은 정보 공유와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 2005년 WHO 총회에서 채택된 새로운 국제보건규칙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합의를 담고 있으나, 이후 신종감염병 유행에서 아직 그 효력이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4년 에볼라 사태 때 제약회사들은 백신과 치료제 개발 필요를 무시했고,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선 국제보건규칙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고도 치료제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전 지구적 빈곤과 불평등의 골은 감염병에 대응하는 국제 협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다.

코로나19 경험에서 볼 수 있듯 신종감염병의 위력은 거세다. 공포는 감염병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 어렵고 그 특성과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생긴다. 그러나 이는 감염병이 유행하는 초기 국면의 이야기다. 새로운 감염병일지라도 그것을 대하는 사회의 방식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며 익숙한 지점이 많다. 흔히 백신과 항생제를 비롯한 치료제가 감염병에서 인류를 자유롭게 했다고 생각하지만, 단 하나의 치료제와 백신으로 퇴치한 질병은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감염병 통제는 분리와 검역, 영양 상태를 비롯한 면역의 향상, 위생 습관 등 행동의 통제, 생활수준 향상, 그리고 공중보건 시스템 구축에 기대는 측면이 컸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음에도 손씻기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다. 또한 사회 구성원이 기존에 갖고 있던 차별과 불평등이 감염병에 대한 인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거나 문제를 심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시설 수용자와 흑인 등 소수 인종의 치사율이 높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빈곤 계급과 소수자 계급에 감염병은 더 치명적이다.

한 국가나 한 사회의 대응으로는 안 돼

감염병이라는 하나의 질병에 걸리는 것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감염병의 발생과 전파 자체는 사회적 사건이다. 그리고 감염병 대응은 한 사회의 문화·관습·제도·구조 등 다양한 요소가 작동하는 영역이며, 한 사회의 역량이 집결되는 현장이다. 코로나19 같은 신종감염병이 기존 감염병과 다른 점은, 더는 감염병 대응이 한 국가나 한 사회의 몫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세계가 급속도로 빠르게 같은 경험을 나누고 있으며, 코로나19 유행은 전 인류가 겪을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대응에서는 국가 간 부정의와 내부 불평등이 여전히 깊게 배어 있고, 불균등한 상흔을 남길 것이다. 하나의 질병 공동체로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할지, 신종감염병이 만들어낼 새로운 역사다.

최은경 경북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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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뉴노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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