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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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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쪽방서 쫓겨난 45명의 5년 <노랑의 미로>

어디에나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
등록 2020-05-25 17:48 수정 2020-05-27 00:51

숨이 턱 막힌다. 예기치 못한 충격, 압도적인 기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일 때 그렇다.

<한겨레> 기자 이문영이 쓴 책 <노랑의 미로>(오월의봄 펴냄)도 숨이 턱 막힌다.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만 봐선 낭만적 문학작품이나 추리소설 같다. 표지 위 귀퉁이에 노란색 글씨로 쓰인 ‘가난의 경로 5년의 이야기’라는 부제는 얼른 눈에 띄지 않는데, 이 책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2015년 2월, 서울 용산구 한 ‘쪽방촌’ 건물에서 강제퇴거 사건이 벌어졌다. 건물주가 방 한 칸에 한 평도 되지 않은 45개 쪽방에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몸을 누이고 살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쫓아내고 게스트하우스로 건물을 리모델링하려던 게 발단이었다. 지은이는 2015년 4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1년 동안 <한겨레21>에 사건의 전 과정과 뒷이야기를 연재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재가 끝난 뒤로도 4년이나 더, 당시 강제퇴거자 45명의 삶을 좇았다. 이 책은 그 5년의 기록이다. 대부분 60대 이상 고령이었고, 그사이 9명이 세상을 떠났다. 장의사, 막일꾼, 미장공, 노점상, 고물상, 넝마주이, 청소부, 철거용역, 또는 무직 같은 칭호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짐작하게 한다.

책에는 69개 이야기가 실렸다. 이야기마다 두 글자의 소제목과 번호가 달렸다. 0번으로 시작하는 ‘입구’의 전문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의 예고편이자 전부다. “가난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엔가 모여 있다. 어떤 가난은 확산되지만 어떤 가난은 집중된다. 가난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지고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 가난의 이야기가 노란 집에 있었다.” 그 뒤로, 벌레, 씨바, 천국, 기억, 소란, 없다, 철거, 웬수, 단전, 꽝꽝, 미소, 흡혈, 귀가, 예언, 망자 같은 제목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은이는 쪽방촌 사람들의 현실과 일거수일투족까지 담담하고 치밀하게 묘사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서술한 문장은 곳곳에서 문학적 은유로 아름다운데,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비현실적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가려진 삶처럼. 그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생과 사 사이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자주 아프고, 싸우고, 무시하고, 의지했다. 냉방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몸뚱이가 한참 뒤에야 반질반질 살이 오른 구더기들과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죽음이 일상인 골목에서 연말이면 대기업 회장단이 ‘사랑의 기증품’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은 “여러분을 가장 먼저 챙기겠다” 선언하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잊었다.

‘입구’로 시작한 책은 맨 마지막도 ‘다시’에 이어 ‘입구’로 끝난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죽고 나서야 더는 쫓겨나지 않는” 인생들의 ‘미로’와 똑 닮았다. 지은이는 누가 어떻게 이들의 출구를 만들어야 할지 말하진 않는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어서일까.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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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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