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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갑질의 원조의 원조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
등록 2020-05-11 13:50 수정 2020-05-15 01:33
<가부장제의 창조>

<가부장제의 창조>


남성은 이전에 자기 집단의 여성을 지배해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와 위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정복당한 집단의 여성을 노예로 만들면서 시작된 노예제의 제도화로 표출되었다. ‘노예제의 발명’은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외부 집단으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강제로 예속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관념 속에 존재하였다.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강세영 옮김, 당대, 2004), 138쪽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로 맘먹고 맨 먼저 고른 책은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다. 내 안의 가부장이 문제라 생각하고 가부장제에 관심 가졌을 때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데 밑줄 긋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오래된 책이라 절판됐겠지 했는데 웬걸! 개정판이 나와 있다. 어느 눈 밝은 독자가 이렇게 좋은 책이 묻히면 안 된다고 사전 구매 운동까지 벌여 출판사에서 재출간을 했다고 한다. 근사한 뒷이야기에 얼른 책을 사서 읽었다. 아, 이렇게 좋은 책을 이제야 읽다니!
<가부장제의 창조>는 미국역사학자협회 회장을 한 사학자 거다 러너가 쓴 여성사 분야의 고전이다. 거다 러너는 미국 최대 여성운동 단체인 전미여성연맹(NOW)의 창설회원이며, 대학에 여성사 커리큘럼을 처음 도입하고 박사과정을 개설한 여성사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그는 주부로 살다가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역사학 공부를 시작했다. 절멸 위기를 겪은 유대인으로서 역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라는데, 정작 그가 필생의 주제로 삼은 것은 유대인이 아닌 여성의 역사였다. 미국 사회에서 백인 유대인은 인종차별의 이득을 누리지만 여성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타자로서 여전히 차별받고 있어서였다.
그에게 여성사는 단순히 여성(Female)의 역사가 아니라 “차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면 여성은 차이로 인해 차별받은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최후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창조>는 바로 이 차별의 기원을 밝힌 책이다.
거다 러너는 남성 지배가 자연적이라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자와 전통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제는 기원전 3100년께부터 기원전 600년까지 약 2500년에 걸쳐 성립된 역사적 산물임을 분명히 한다. 그에 따르면, 문명 이전 사회의 평등했던 성별 분업은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을 거치며 불평등한 종속관계로 바뀌었다. 재생산 능력이 있는 여성은 자원의 일부로 교환·전유됐고 사유재산제·시장경제·노예제가 발달하면서 가부장제 국가가 공고해졌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분노하는 모든 갑질의 원조, 위계적 지배의 원점이자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노예제가 여성 억압에서 비롯했다는 점이다. 여성과 어린이를 노예화해본 남성은 모든 인간 존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후 노예제라는 착취의 제도화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 오래된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디지털 성착취 범죄자들이 여성 피해자를 ‘노예’로 칭하고 ‘분양’하고 ‘성폭행’을 모의한 까닭은 성적 호기심이나 욕망이 아니라 단지 타인을 지배하고픈 욕망, 가부장제의 중심이 되고픈 권력욕 때문이란 것이다. 둘째, 억압과 차별이 없는 평등한 미래, 인간다운 삶은 페미니즘과 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말한다. 사람을 사람대접 안 하는 세상을 끝내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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