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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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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목마을에 남은 ‘분단 생채기’

웅덩이와 땅굴, 빈목마을에 남은 ‘분단 생채기’
베트남전 때 미군 폭격과 이를 피하려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
등록 2020-04-29 09:47 수정 2020-05-02 19:29
비무장지대를 둘러보는 여행자들이 14번 도로에 있는 ‘호찌민 루트’ 표지석을 바라보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둘러보는 여행자들이 14번 도로에 있는 ‘호찌민 루트’ 표지석을 바라보고 있다.

날이 밝았다. 열차 왼쪽 창밖으로 논이 이어졌다. 오른쪽 논의 끝자락에 서부 산악지대가 보였다. 열대 나무들이 계속 뒤로 물러났다. 마을 앞 논에는 아침 일찍부터 나왔을 부지런한 농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먹으며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조식 레스토랑의 전망으로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객실이었다.

오전 10시47분, 열차는 정시에 옛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성이 있는 후에역에 도착했다. 후에역에 내려 내가 탄 객실을 담당했던 차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년을 훌쩍 넘긴 차장은 베트남 철도에서 청춘을 보냈다. 전날 밤 하노이역 승강장에서 내가 한국의 기관차 운전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우리는 한 가족”이라며 반갑게 인사한 철도원이었다. 야간열차 복도에서 만났을 때는 20대부터 베트남을 남북으로 달려, 아마도 베트남에서 자신이 가장 많이 남북을 오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자랑했다.

여러 나라의 철도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깨달은 건 하나같이 철도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기관사든 차장이든 정비원이든 가슴 가득 자부심을 담고 있었다. 철도원은 행복한 직업이다. 철도의 매력은 그것을 타는 사람에게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묘한 떨림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작별 악수를 한 차장은 업무를 위해 객차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 열차는 출발했다. 열차 꼬리가 승강장을 벗어나 남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역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북위 17도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도시, 후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프랑스군은 10월19일 하노이 통제권을 보응우옌잡 장군의 수도연대에 넘겨주고 도시를 떠났다. 프랑스 철수 이후 베트남 문제를 다룬 스위스 제네바 협의안은 북베트남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위를 인정하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리하되, 2년 안에 남북 총선거를 해 베트남 민중이 선택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결국 북위 17도선에 비무장지대가 설정됐다. 후에는 분단된 베트남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가장 큰 도시다. 냉전의 피가 혈관을 장악한 미국 워싱턴 인사들은 베트남을 또 하나의 한반도로 생각했다. 케네디부터 존슨과 닉슨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자유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단순 논리가 미국의 베트남 정책 기초가 되었다.

반공주의자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간택을 받아 남베트남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진행된 일은 제네바 평화협정을 파기하는 행위였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원 아래 남북 총선거를 무산시켰다. 응오딘지엠은 친위 체제를 구축했고, 그의 동생 응오딘뉴는 비밀경찰 총수가 되어 공포정치를 했다. 응오딘뉴는 7만5천 명을 반체제 인사로 몰아 죽였고 5만 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재판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간다는 혐의만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갇히는 사람이 속출했다.

남베트남의 반정부 세력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해 응오딘지엠 정권과 싸웠다. 이들이 바로 북베트남 정규군과 구별되는 베트남 코뮤니스트, 즉 베트콩이었다. 1968년 ‘뗏 공세’로 알려진 1월30일 구정(음력설)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해방전선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벌인 전면 공세(이하 ‘구정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전에서 북베트남과 베트콩 부대가 남베트남군과 미군을 몰아내고 가장 오래 항전한 도시가 후에였다. 후에 탈환에 나선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시가전을 벌였다. 옛 왕조의 문화와 역사가 녹아 있던 후에 왕궁은 한 달 동안 계속된 미군 폭격 끝에 폐허가 되었다.

후에의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 따가운 햇볕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북위 17도선 아래의 도시라 하노이와는 큰 기온 차이를 보였다. 하루 사이에 털점퍼에서 반소매 티로 바꿔 입게 만드는 베트남이었다. 후에 성을 걸으며 이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에서 벌어진 전쟁을 생각했다.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베트남 옛 분단현장 답사 경로

베트남 옛 분단현장 답사 경로

미군이 폭격하던 ‘호찌민 루트’엔 가방 멘 아이들이

1월15일, 후에에서의 둘째 날이다. 일찌감치 서둘러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비무장지대 투어버스에 올랐다. 인터넷에서 신청한 뒤, 여행 전날 후에의 여행사에 들러 예약확인서를 보여주면 투어 승차권을 발급해주고 다음날 호텔 앞으로 버스가 온다.

중형버스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버스는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이어지는 간선도로인 1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2시간 가까이 달린 버스는 동하에 도착해 가이드를 태웠다. 잠깐의 휴식 뒤 버스는 서쪽으로 나 있는 9번 도로를 탔다. 베트남전쟁 때 미 해군 사령부가 관할한 전략 도로였다. 9번 도로는 다시 라오스까지 이어지는 16번 도로와 만났다. 버스는 서쪽 첩첩산중으로 들어갔다.

베트남은 전체 국토의 80%가 산악지대다. 20%의 평야지대는 북쪽 하노이 홍강 일대와 남쪽 호찌민 메콩(끄울롱)강 델타 지역, 그리고 길게 이어진 해안가에 있었다. 산속에 터를 잡은 소수민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트남 민중은 평야지대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다.

달리던 버스는 16번 도로와 나란히 흐르는 탁한강 위로 놓인 현수교 앞에 선 뒤 시동을 껐다. 현수교는 14번 도로로 이어지는 다끄롱다리였다. 현수교를 걸어 강을 넘어가니 도로 한쪽에 ‘호찌민 루트’ 기념비가 서 있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해방전선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베트남 산악지대에 수천㎞ 길을 내어 무기와 탄약을 운반했다. 미국은 공군 전략 폭격으로 호찌민 루트를 봉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폭탄 세례로 길이 끊기면 밤새 복구대가 투입됐다.

2020년에는 폭격의 역사는 아랑곳없이 호찌민 루트를 따라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가방을 둘러메고 긴 막대풍선을 입에 문 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 시절 늘 따라붙었던 지루한 오후를 앞둔 하굣길 아이들이 신기함 반, 익숙함 반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관광객들을 지나쳤다.

가이드는 1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80㎞ 정도 더 가면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의 현장이던 햄버거힐이 있다고 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햄버거힐 전투는 1969년 5월10일부터 20일까지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던 아샤우계곡 서쪽에 솟은 해발 937m 높이의 압비아산을 미군이 공략하는 작전이었다. 병사 주검이 산등성이 가득 햄버거 패티처럼 쌓였다고 해서 햄버거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군은 햄버거힐을 점령한 뒤 곧바로 철수했다. 햄버거힐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지도 아니었고 이런 산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첩첩산중 고지 하나에서 그저 적을 몰아낸 작전이었던 햄버거힐 전투는 베트남전의 묘한 실체를 보여줬다. 전쟁 말기 미군 사병들의 장교 살해 시도가 급증했다. 위험한 수색정찰을 독려하는 장교들에게 한두 차례 경고가 주어져도 변화가 없으면 사병들은 장교 숙소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전투 현장에서 사살한 뒤 전사 처리를 했다. 특별히 위험한 작전을 고집한 장교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햄버거힐 전투 지휘관에게는 1만달러가 걸렸다.

1968년 케산엔 거대한 폭풍이 이미 와 있었다

버스는 다시 라오스 국경을 향해 달렸다. 점점 더 산이 가팔라져 버스는 뱀처럼 휘어진 도로를 힘겹게 올랐다. 마침내 버스가 도착한 곳은 군사박물관이 있는 케산이었다. 케산은 북쪽 군사분계선까지는 약 23㎞, 서쪽 라오스 국경까지는 10㎞ 떨어진 곳으로 미 해병대가 수색 전진기지로 삼은 곳이다. 북베트남군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라오스 국경지대를 통과하는 호찌민 루트까지 작전을 벌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산 정상 평평한 고원에 중형 수송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가 건설됐고, 벙커와 참호가 만들어졌다. 탱크와 장갑차가 기지 곳곳에 배치돼, 세계 최강 군대의 전략기지다운 면모를 갖췄다. 산등성이가 밀집한 곳에 섬처럼 있는 기지였지만, 항공기로 충분한 보급과 화력 지원을 받아 미군은 적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1월 초부터 북베트남의 대규모 병력이 케산을 포위했다. 미군이 정글에 뿌려놓은 음성 감지기가 대거 신호를 보내왔다. 해병대 수색대원이 북베트남군 저격수들과 마주쳤을 때, 케산에는 거대한 폭풍이 이미 와 있었다. 해병대는 비상사태에 들어갔고, 6개 대대 5600명이 바로 증원됐다. 1월21일 새벽 북베트남군 포병대의 장거리포가 조준사격을 하듯 정확히 케산 기지를 폭격했다. ‘구정 공세’ 9일 전 시작된 북베트남군의 포위 공격은 77일간이나 계속된다.

미로처럼 이어진 빈목터널. 빈목마을 사람들은 미군 폭격을 피해 지하에 굴을 뚫고 살았다.

미로처럼 이어진 빈목터널. 빈목마을 사람들은 미군 폭격을 피해 지하에 굴을 뚫고 살았다.

미국판 디엔비엔푸가 된 케산 전투

케산 전투가 한창일 때 군 당국은 언론들로부터 프랑스가 베트남 군대에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디엔비엔푸 전투를 빗대 미국판 디엔비엔푸가 아니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받아야만 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전략은 ‘서치 앤드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로 숨어 있는 적을 찾아서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전력에서 절대적 열세인 적들이 정면 대결을 피해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감히 북베트남군이 전면 공세를 시작했다. 그동안 미군은 계속되는 승리로 북베트남군을 약화하며 궁극적인 승리의 길로 간다고 주장했다. 케산 공방전은 미군이 거짓말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미디어는 앞다퉈 케산의 전황을 미국인들 안방으로 실어 날랐다. 공포에 질려 포위된 5천여 명의 해병대원과 사이공을 비롯해 남베트남 전역에서 벌어진 ‘구정 공세’ 모습이 서방세계의 안방에 송신됐다.

미국에서 신뢰받던 뉴스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가 스튜디오의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 국방부는 이제 죽기 살기로 케산이 디엔비엔푸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케산을 둘러싼 북베트남군 포위 지역에 막대한 물량을 동원한 미군의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넷플릭스 콘텐츠로 올라 있는 미 공영방송 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10부작은 케산 전투 현장을 생생히 보여준다. 포탄이 작렬하는 필름 속 현장에 내가 서 있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벙커와 탱크들, 언덕 위 활주로가 있던 자리에 전시된 수송기가 이곳이 베트남전쟁에서 치열한 전장이었음을 말해주었다. 북베트남군은 두 달 넘는 공방전 끝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겨우 케산 기지를 지켜낸 미군은 전투 승리를 선언하고는 서둘러 짐을 싸 기지를 버리고 떠났다. 미국 시민들은 이 어이없는 행태를 보고 베트남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두 가지 색으로 나뉜 히엔르엉다리 난간의 비밀
버스는 케산에서 다시 동하로 돌아와 1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버스가 북위 17도선에 다다르자 옛 분단의 현장이 나타났다. 남북을 갈라놓은 벤하이강 위에 놓인 히엔르엉다리가 보였다. 다리에는 사람 허리 높이의 난간이 설치됐는데 정확히 반으로 나눠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히엔르엉다리를 지나친 버스는 1번 국도를 벗어나 해안 마을로 향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빈목마을이다. 베트남이 분단됐을 때 비무장지대 바로 위쪽 북베트남 마을이던 빈목에는 미로 같은 지하 땅굴이 있다. 수시로 벌어진 미군의 공중폭격을 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판 것이다.
땅굴로 향하는 길에는 커다란 웅덩이들이 있다. 미군 폭격으로 파인 웅덩이다. 빈목터널 역사관에는 폭격당한 빈목마을의 항공사진이 걸려 있다. 지상의 모든 곳이 달 표면 분화구처럼 폭탄 웅덩이로 가득 차 있었다. 역사관 전시실 입구에는 미군의 폭격에도 지하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습이 부도로 재현돼 있다. 작품에는 빈목마을 사람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To be or not to be’. 마을 사람들에게 폭격은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문제였다.
어둠 속 터널 안에서도 삶은 계속됐다. 아이들은 공부하고 노인들은 돌봄을 받고 새 생명은 태어났다. 소형 랜턴을 켜고 거미줄 같은 동굴을 헤쳐나갔다. 동굴 끝자락에서 보이는 밝은 빛이 인도하는 곳으로 나갔다. 동해가 파란 하늘 아래 펼쳐졌다. 터널 안에서 먹먹했던 가슴이 바다를 보니 한결 나아졌다. 후에로 돌아와 간단한 저녁을 먹고 역으로 가 7시56분발 냐짱행 SE7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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