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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지은, 이토록 성실한 민주주의자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떠오르는 질문들
등록 2020-04-22 12:49 수정 2020-05-02 19:29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펴냄, 266쪽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펴냄, 266쪽

지금 내 삶은 선인장의 삶이다. …나를 보호해주던 가시조차 뽑혀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선인장을 그대로 놔두어주었으면 좋겠다. 왜 사막에 사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삶마저 위협하는 행위들을 이제는 멈춰주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폭행을 당했고, 살기 위해 도망쳤고, 살아내려 노력할 뿐이다. 그게 다다.

김지은, , 봄알람 펴냄, 266쪽

유력 대선 주자였던 안희정의 성폭력을 고발해 세상을 놀랜 김지은이 책을 썼다. 제목은 거두절미하고, . 서점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힘든 싸움을 잘 버텨준 저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샀다. ‘좋아요’를 누르는 마음이랄까. 책은 샀으나 읽고 싶지는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고 싶지 않았고, 아니 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상처를 보는 건 괴롭다. 괴로운 건 질색이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해치우듯 버스 안에서 설렁설렁 책장을 넘겼다.

“세상을 향한 두 번째 말하기를 결심했다. 살기 위해 선택했던 첫 번째 말하기가 극심한 고통을 주었기에 한참을 주저했다. …글을 쓰는 동안,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나를 묵묵히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나긋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눈시울이 뜨끈했다. 혼자 백지를 채워나갈 때 비로소 안심되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기에, 그의 고독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처음으로 그가 궁금했다. 김지은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기에 “여성의 역할은 침묵을 지키는 것”(바울로)이라고 가르쳐온 이 세상을 향해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할 용기를 냈을까?

당찬 투사를 상상하며 읽었다.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미투’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오죽하면 (네가) 그랬겠냐’고 이해하며 걱정했을 만큼, 그는 잘 참고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큰소리를 내기는커녕 큰소리로 이름이 불렸다고 울음을 터뜨리던 소심한 아이였다. 그런 사람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세상에 나선 것은, 후배가 자신 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신이 무너져내리는 제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이 침묵하면 범죄가 계속되리란 사실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나의 상처는 어떻게든 숨기고 가릴 수 있겠지만, 멈추지 않는 범죄를 방조하며 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상처에만 마음 쓰고, 상처 입지 않으려 침묵으로 범죄를 묵인하고, 남들도 다 그런다고 강변하는 세상에서, 그는 피해자보다 방관자로 사는 게 더 괴롭다고 말한다. 고발 이후 2차, 3차 가해가 이어지는 죽음 같은 시간, 제 손으로 제 몸을 때리고 자학하며, “제발 누군가 이 분노가 멈출 수 있게 ‘이해해. 공감해. 동의해’ 하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애원하면서도, 그는 타인을 염려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후배에게 지킬 수 있었음에 안도하고, 다른 피해자와의 연대를 배웠음에 감사한다.

그에게 왜 피하지 않았냐고, 왜 진작 그만두지 않았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범죄 사실을 처음 알린 날부터 대법원에서 범죄가 최종 인정되기까지 554일의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묻고 싶었다. 김지은씨, 당신은 어떻게 이처럼 성실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었나요? 당신은 어떻게 사막 같은 환경과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뜨거운 눈물로 초록을 일구는 선인장이 될 수 있었나요? “오랫동안 외면했던 고통을, 늦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멈추고 싶었다. 미투를 했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당신의 그 힘을 배우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단호하지만 너그러운 그는 기다려줄 것이다. 부끄럽게 나이만 먹은 선배가 사막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그래서 나는 지치지 않고 나아갈 작정이다. 그래야 한다.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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