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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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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대로 살자, 그런데 ‘내 식’이란

<내 안의 가부장>에서 발견한, 여성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등록 2020-03-31 12:07 수정 2020-05-02 19:29
사우 제공

사우 제공

우리의 내면 가부장은 누구에게 기초교육을 받았을까? 바로 어머니다. 가부장제 문화의 가치를 반복하는 어머니들은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내면 가부장에게 전파한다.
- 시드라 레비 스톤, (백윤영미 옮김, 사우, 2019), p. 82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렸다. 불면의 밤마다 부끄러운 일들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겼고 자기반성은 이내 자기비하로 이어졌다. 쓰기로 한 책의 계약금을 돌려주고 10년을 이어오던 연재를 그만뒀다. 툭하면 울고 원망하고 미안해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어느 날, ‘어차피 절망뿐이라면 뭘 겁내고 주저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과 인정을 바라며 살아온 인생은 실패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내 식대로 살아보자 싶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한데 문제가 있었다. ‘내 식’이 뭔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맥이 빠졌지만 심기일전. 도서관에 갔다. 서가를 헤매다 이란 책을 발견했다.

“젊은 시절, 가장 자부심을 느꼈던 건 내가 다른 여성들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내가 다른 여성들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더 남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관계와 가족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은 타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밀쳐두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여성은 큰 대가를 치렀다. 자신을 위해 사고하고, 선택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타인 우선이라는 규칙에 불복하고, 관계와 돌봄과 연관된 재능에서 벗어난 여성이라야 세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내 이야기였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도 나를 위해 성공하지도 못한,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원망과 후회에 사로잡힌 내가 거기 있었다.

40년 넘게 심리치료사로 일하며 ‘자아들의 심리학’을 개척한 시드라 레비 스톤은, 오랜 페미니즘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여성 안에 내재된 ‘내면 가부장’에서 찾는다. 내면 가부장은 여성의 발목을 잡을 뿐 아니라, 혐오가 난무하는 젠더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남성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며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 위에서 번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나쁜’ 내면 가부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내 안에 나를 심판하는 가부장이 있다는 건 알았고 그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그림자, 이걸 어떻게 물리치지?

한데 저자는 그게 아니라고, 싸우지 말라고 한다. ‘내면 가부장은 나쁘다’는 인식 자체가 가부장제의 이분법을 답습하는 것이라면서. 대신 그가 제안하는 것은, 내 안에 가부장이 있음을 인정하고 내면 가모장과 함께 자문가로 삼는 길이다. 순응하지도 거부하지도, 싸우느라 불안해하지도 말고, 그냥 그의 의견을 듣고 내가 독립적으로 판단하라고 권한다.

과연 가능할까. 우리 어머니들이 단지 어리석어서 가부장의 수호자가 된 건 아니듯이, 수천 년 동안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독립의 구체적인 방도를 일러준다. 실용적이라 당장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일단 내 시간과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여기까지는 다가와도 되지만 내가 응하기 전에는 더 다가오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부터 전하기로 했다. 그렇게 독립의 첫발을 떼고 나면 그다음엔 또 다른 길이, 진짜 내 식대로 사는 길이 보이리라.

김이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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