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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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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대로 자란다… 아이가 아니라 내가

‘돌봄 노동자’로 살아본 뒤 처절하게 깨달은 것들
등록 2020-03-24 10:20 수정 2020-05-02 19:29
옥상 텃밭에서 물 주는 아이들. 서울 강서구 제공

옥상 텃밭에서 물 주는 아이들. 서울 강서구 제공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개학 연기로 유례없이 기나긴 방학을 보내는 내 아이는 겨울잠을 자듯 달고 긴 늦잠을 잔다. 한동안 (‘팔등신’이라는)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중이라더니 이제는 (전날 모호하게 꾸다 만) 꿈을 이루는 중이란다. 날씨는 수상하지만, 그래도 대지에 봄기운은 올라오고 태양은 일찍 솟아나고 아이가 눈뜨는 시간도 절로 앞당겨진다.

아이는 무언가를 돌보기를 좋아하고 잘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북이 밥 주고 분무기로 화초 물 뿌려주고 몇 년 전 뒷산에서 주워다가 화분에 심은 도토리나무를 살피고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뒤져 푸성귀를 잘라 달팽이에게 먹인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할 때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할 줄 알고 못 알아들어도 싫은 기색 없이 몇 번이고 똑같이 성의껏 대한다. 자식이지만 어쩔 땐 맹렬한 질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내가 악전고투하며 길러온 자질을 저 아이는 어쩜 저렇게 당연한 듯이 타고난 것일까. 어쩜 저렇게 싱글싱글 웃으며 너끈히 하는 것일까. 물론 아이의 돌봄은 소꿉놀이 수준이고, 내 자식이니 아무래도 내 눈에는 좋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 승한 기질임은 틀림없다.

엄마로 10년가량 살고 난 즈음에야 엄마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고 살아야 하는 대로 생겨(지게 애써)야 함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해결사 기질이 강한 전형적인 ‘업무형 인간’인 나로서는 가장 못 견디는 게 ‘모호함’인데, 자식을 키우는 일이 딱 그거다. 모호하기 짝이 없다. 실적이 바로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가 한꺼번에 얽히고설킨, 리스크(위험)마저 큰 작업이다. 이런 성정의 엄마일수록 자식을 키우는 데 힘이 많이 들어간다. 때론 학업 같은 눈앞의 성취에 연연하는 어리석은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나 역시 ‘돌봄 노동자’로서 내 정체성을 진작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잘하는지, 이렇게 하면 맞는지, 확신도 참고 자료도 없었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 가운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한동안 나뿐이었다.

온화함 다정함 등과는 거리가 멀어도 결단력 추진력 등은 나름 지닌 터라 돌봄 대상의 건강과 안전을 비교적 잘 지켜왔다고 믿는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믿는 대로 자란다는 말은 아이가 아니라 나를 보면 확실히 맞다. 그렇게나 잘되지 않던 감정적 ‘온·오프 모드 전환’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리된 것 같다.

한때 월요일 오전 9시면 나를 찾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가정생활이, 다른 한 명은 직장생활이 부대끼는 이들이었다. 말 안 듣는 남편과 자식이 밉고, 군림하는 상사와 일 못하는 팀원들이 너무 미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화나 카톡으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어느 날 깨달았다. 그들은 나와 사교하거나 내 생각이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그 시간에 푸념을 들어줄 만하다고 여겨서였다. 주부의 월요일 오전 9시는 편하게 한숨 돌리는 시간이 절대 아니다. 어느 때보다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 시간이다. 주말 내내 쌓인 집안일을 해치우고 늙은 부모가 가까이 있다면 서둘러 들여다봐야 한다. 부정기로 하는 일감이라도 있으면 새삼 마음이 바빠진다. 둘 다 아이를 키워본 이들인데 미안하지만 헛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처지를 헤아리고 배려하기보다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내가 느낀 점을 다정하고 섬세하게 말해줬다. 한 명은 부끄러워했고 다른 한 명은 삐져버렸다. 할 수 없다.

돌봄에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성실함을 첫손에 꼽겠다. 나는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하루하루 ‘성실하게’ 확인하며 산다. 그 와중에 발견한 유쾌한 사실은 ‘대충 해도 되더라’는 점이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된다. 허덕이지 않아야 좋은 돌봄이 가능하다.

김소희 칼럼니스트*‘김소희의 엄마의 품격’을 마칩니다. 품격 있는 엄마가 되어 돌아올게요. 어쩌면 ‘할매의 품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새로운 칼럼으로 계속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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