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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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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자리

‘똥볼’만 차온 정치인이 빛났던 순간
등록 2020-03-07 13:29 수정 2020-05-02 19:29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3월3일 대구동산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 진료를 위해 음압병동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3월3일 대구동산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 진료를 위해 음압병동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술과 기능을 갖고 이름 있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는 이런저런 인생의 부침을 겪다가 소도시의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쭈뼛거리며 일을 시작한 그곳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언니들’ 아무도 친구의 삶의 배경을 묻지 않았다. 물론 혼인, 자녀, 배우자 밥벌이 여부, 거주지 위치 등은 근무표 조정하느라 차츰 서로 알게 되었지만, 어느 학교 나와서 무슨 일 했는지, 어떤 직급이었는지, 살림 형편이나 재산 수준은 어떠한지 따위 그간 삶의 이력에서 늘 ‘스캔’당하던 것들은 의외로 관심 밖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좋고 편안했다는 친구는 그간 자기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들 틈에서 부대꼈는지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몇 년 일하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언니들 회식 자리에는 되도록 꼭 참석한단다. 정말 재미있고 좋아서.

업종 전환을 해보면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끼리끼리 비슷한 사람들이 일하는 단순 이직으로는 해보기 힘든 경험이다.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내 능력과 됨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아실현’ 하려고 마트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이들은 없다. 대부분 생계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조건이나 배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체력과 성실성이 관건이다. 어디서나 속 깊고 재바른 사람은 사랑받지만 생계형 일자리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무거운 짐 나를 때 도와주거나 빠른 손놀림으로 앞장서 정리해주거나 무엇보다 급한 근무 바꿔주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그곳에서 일하는 누구든 삶의 다른 지지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대구로 달려가 의료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랑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나보다. 포털 뉴스 댓글에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간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가진 답답함과 안타까움도 묻어났다. “고맙습니다, 계속 그것만 해주세요”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정치만 빼고” 등.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며 불출마한 이후 정치 인생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북한 김정은의 속셈만큼이나 오리무중이었던 안철수의 새 정치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는 말하자면 ‘좋은 일’ ‘의로운 일’이 하고 싶었나보다.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하듯 나쁜 정치도 치료하고 싶었나보다. 삿된 욕심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때마다 당적을 바꾸거나 떠나는 바람에 ‘철수 정치’ ‘철새 정치’라는 희화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진심’은 사라지고 ‘고집’으로만 평가받았다.

대체 안철수는 왜 이런 ‘똥볼’만 차온 것일까. 둘 중 하나다. 실력이 없거나, 실력도 없는데 조바심을 내거나. 그 와중에 팀워크까지 좋지 않으면 백전백패다. 정치인 안철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짐작이 간다. 많이들 실망하며 떠났다. 급기야 올해 총선을 앞두고 당을 만든 뒤 지역구 후보 한 명 내지 못하는 처지에서 사실상 공허한 ‘반문’을 표방하는 걸 보니, 이제는 정말 안철수를 이용해먹으려는 이들만 남았구나 싶었다.

안철수가 대구에서 빛나는 건 필요한 곳에서 어울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방호복 속 땀범벅이 된 의료진이 그들이다. 이곳에서 안철수의 이력이나 정치적 시행착오는 전혀 의미가 없다. 검체 한 번 더 채취하고 환자 한 번 더 살피는 묵묵한 수행력이 중요하다. 어쩌면 정치인 안철수도 처음부터 ‘대장’을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일원’으로서 제 몫을 했다면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차근차근 정치적 힘을 키우며 괜찮은 팀플레이를 하고 있거나 진작 미련 없이 떠났거나 말이다.

많이 늦지 않았다면 그를 추어올려 이용하려는 ‘세력들’ 말고 그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게 하는 ‘동료들’ 속에서 정치든 봉사든 하면 좋겠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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