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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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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출발부터 ‘트랜스’ 젠더였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여학생이
입학했다면…
등록 2020-02-22 07:48 수정 2020-05-02 19:29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상상을 해보았다. ①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여학생이 사실은 등록하고 학교를 다닌다. ② 가까운 친구들, 동기, 선후배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잘 지내고 ③ 그들과 홍성수 교수를 비롯한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가이드라인이 국내 대학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데 ④ 특히 숙대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접근성과 안전성, 디자인까지 빼어나 다른 대학에서 탐방 올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거 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건가.

코로나19 여파로 정신없는 와중에 그 학생이 등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일부 시비 거는 목소리가 있을지언정 상식적으로 여자대학 공동체 안팎에서는 환영의 목소리가 대세를 이루리라 여겼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환영의 목소리는 그저 폭넓게 퍼져 있었다면 반대의 목소리는 결사적으로 날을 세워 휘둘러지고 있었다. 부정과 혐오, 배제의 언어가 난무했다. 단지 게시판 댓글 수준이 아니라 이런저런 개인과 단체의 성명에도 버젓이 올랐다. 시종일관 그를 생물학적 남성이라고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위협하는 자,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했다. 심지어 “내시”라거나 “비둘기가 되고 싶어 뒤뚱뒤뚱 걸으려는 인간”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나아가 생물학적 여성만 입학하도록 학칙을 바꾸고 성별 변경을 못하도록 하는 법 제정 운동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런 ‘격분’이 아니라도 왜 하필 여대냐, 조용히 있지 그랬냐, 그렇게 아쉬우면 트랜스젠더 대학 만들어라 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득권의 언어가 쏟아졌다.

논리도 없고 존중은 더더구나 없는 이 언어들은 래디컬(급진적)이라는 수식을 단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나왔다. 한 공간에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자라니… 대체 이게 ‘페니스 파시즘’과 다를 게 무언가. 주어만 바꾸면 소름 끼치게 닮았다. 왜 여자가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오려고 해. 승진? 왜 멀쩡한 남자들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해. 군대도 안 다녀온 너희가 우리 고충을 알아? 왜 가만히 있지 않고 나대. 그렇게 아쉬우면 너희끼리 따로 살아….

거칠고 날선 목소리들 앞에서 당사자가 멈춘 것이 십분 이해됐다. 그는 “나는 비록 여기서 멈추지만, 앞으로 다른 분들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는 역대급으로 품위 있고 선명한, 연대의 변을 남겼다. 시점으로 보나 인터뷰 내용으로 보나 그는 처음부터 성정체성을 밝힐 생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성전환 수술 뒤 전역 판정을 받은 육군 변희수 하사를 보고 ‘저도 여기 있어요’ 용기 내어 손 흔들었던 게 아닐까. 그 용기에 대해, 비록 일부이나 놀라울 정도로 과잉 대표된 신경질적이고 두서없는 언어들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입학을 허용하면 더는 학교가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고? 학교까지는 무서워서 어떻게 왔니. 집 밖은? 이불 밖은? 트랜스젠더는 꾸밈노동 등 성역할을 강요하는 시선에 복무한다고? 이거야말로 이분법적 염색체 결정론이다. 모든 여성이 꾸미기를 원치 않듯,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다. 젠더 구도를 만든 가부장제 등 성별 위계질서를 깨야 하는데 (굳이 젠더를 선택하려는) 트랜스젠더리즘은 이에 역행한다고? 이쯤 되면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이건 급진이 아니라 미숙함이다. 구체적인 서사도 맥락도 없는 혐오에 가득 찬 주장을 ‘페미니즘의 한 갈래’ ‘여성주의 빅텐트’로 과연 용인해야 하나.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반대하고, 기회를 박탈하는 게 차별이다.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게 뼈아프다. ‘짬에서 나온 바이브’가 고작 이 정도라니 정말 쪽팔린다.

페미니즘도 한때는 정신병 취급을 받았다. 여성이 겪는 불평등과 억압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타고난 성을 뒤흔들고 바꾸려는 불순한 짓으로 불렸다. 페미니즘은 출발부터 ‘트랜스’ 젠더였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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