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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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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소문의 정체

1930년대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에서 비난당한 이동휘
사회주의 내부 불화 과정에서 이득 얻은 세력은 누구일까
등록 2020-02-08 19:24 수정 2020-05-02 19:29
1921년 1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접견실에서 만난 왼쪽부터 레닌, 박진순(캐리커처), 이동휘. 임경석 제공

1921년 1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접견실에서 만난 왼쪽부터 레닌, 박진순(캐리커처), 이동휘. 임경석 제공

잡지 1931년 8월호에는 이동휘(1873~1935)에 관한 흥미롭지만 자못 기이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동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회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봉변당했다는 얘기다. 조선 실정에 관한 무지로 레닌에게서 책망받았다는 거였다.

회견 석상에서 레닌이 물었다. 현재 조선에 부설된 철도 길이가 얼마인지, 또 해안선이 몇 마일이며, 최근 1년간 산물이 얼마인지를 질의했다. 이동휘는 쩔쩔맸다. 거듭되는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레닌이 책망하듯 말했다. “동무여, 그렇게 조선 실정을 모르고 어떻게 조선 일을 하시렵니까?”

과연 사실일까? 일국의 혁명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면박을 주었다는 게, 아무리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라 할지라도 있을 법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는 1931년 6월 창간해 등과 더불어 여론에 영향력을 미치던 합법 사회주의 잡지였다.1)

유학생 출신 2030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비난

이동휘 에피소드의 집필자는 필명 ‘지양’(止揚)을 썼다. 그는 ‘레닌과 우리 선구 이동휘군’이라는 기사를 써서 이동휘에 관한 무지와 책망의 서사를 소개했다. 혁명운동 노선배를 ‘군’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일본식 풍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 젊은이였을 것이다. 관련자들은 사회주의 실천 운동과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밀운동을 이끌던 이재유는 같은 합법 사회주의 잡지를 ‘프롤레타리아트혁명운동과 유리된 유동분자들의 무책임한 언론’으로 지목했다. 이로 미뤄보면 관련자들은 비밀결사와 연계하지 않은 채 합법 영역에서만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20~30대 사회주의 지식인 그룹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종합지 1931년 11월호 지면에 ‘시베리아의 회상, 잡지 소론에 대하여’라는 비판 기사가 떴다. 이 글을 쓴 필명 ‘창해거사’는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 오랫동안 체류했음을 밝히고, 자신이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피력했다. 이어서 그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앞뒤 맥락을 잘 모르는 일개 서생의 무책임한 발언에 분노가 솟구친다고 통박했다. 그는 레닌과 이동휘의 회견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소개한 뒤, 필명 ‘지양’을 향해 혁명운동의 오랜 선배에게 존경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는 그 뒤로도 계속 사람들 입에 회자됐다. 레닌 회견 때 무지로 인해 면박당했다는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꾸준히 유포됐다. 의 주인공 김산(1905~38)도 그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중국 연안에서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님 웨일스에게 조선혁명 역사를 술회하던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1918년에 이동휘가 맨 처음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갔을 당시 그는 이론이라고는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오로지 대중운동과 소련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다. 조선에- 공장, 철도, 농촌에- 얼마만큼의 노동자가 있느냐고 레닌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은 웃으면서 지노비예프를 불러서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이동휘 동지를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동휘 동지는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방법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자연적인 상태입니다. 그들은 혁명적 기지를 전혀 갖지 못하고 다만 테러리즘과 군사행동의 배경만을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2)

김산이 노혁명가 이동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던 것은 아니리라. 그는 아마 들은 대로 가감 없이 얘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의 진술 내용은 근거 없이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회견 연도도 틀렸고, 배석자 정보도 근거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후대로 내려갈수록 이동휘 불명예 서사는 덧붙여지고 윤색까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잡지 <이러타> 창간호(1931년 6월호) 속표지. 임경석 제공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잡지 <이러타> 창간호(1931년 6월호) 속표지. 임경석 제공

한인사회당 vs 고려공산당

악의적인 풍문은 왜 오랫동안 지속됐을까? 앞뒤 맥락을 잘 아는 이동휘 쪽 인사들이 백방으로 나서서 변호했는데도 말이다. 혹시 그 풍문이 사실이기 때문일까. 사실의 힘이 그처럼 오랫동안 소문에 생명력을 줬던 게 아닐까. 또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면, 게다가 그 세력이 복수였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답하려면 이동휘와 레닌의 회견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동휘는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45살이던 1918년 4월, 망명지이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란 이름의 혁명정당을 결성해,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랐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 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망명길에 오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망명길에 함께 나섰던 비밀결사 신민회의 젊은 동료들이 행보를 같이했다. 이 단체에는 재러동포 출신의 저명한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도 합류했다. 그녀는 하바롭스크를 임시 수도로 하는 극동소비에트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 지방당의 임원이었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적백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의 혼란한 정세 속에 볼셰비키와 보조를 같이했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설되자, 지체 없이 당대표단 3명(박진순·박애·이한영)을 파견한 데서도 이 당의 성격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당대표단은 한인사회당을 국제당 지부로 가입시키고,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거액 지원을 약속받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동휘 자신이 직접 국제당에 대표로 나간 것은 3년 뒤였다. 1921년이었다. 국제당 조직 원칙에 따라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동휘는 당면한 당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의 불화가 그것이다. 국제당의 동방부와 극동비서부의 요직에 취임한 보리스 슈먀츠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등이 이동휘 그룹을 배제하고,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내세워 조선혁명을 주도하려고 나섰다. 이에 호응한 조선인 그룹이 있었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아리랑> 1941년 영문판 초판 표지. 임경석 제공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아리랑> 1941년 영문판 초판 표지. 임경석 제공

민족해방혁명 vs 사회주의혁명

당시에는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해 민족해방혁명이냐, 사회주의혁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이동휘 그룹은 전자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 세력은 러시아혁명과 마찬가지로 조선혁명도 사회주의혁명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양쪽 대립은 심각했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마저 나타났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동휘가 직접 모스크바로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21년 11월28일 이동휘 일행은 레닌과 만났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자격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지도자인 레닌과 공식 면담을 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장소는 크렘린 내부 접견실이었다. 회견에 초대된 조선 대표단은 4명이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홍도 3명과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러시아 이름 ‘김아파나시’)였다. 박진순과 김성우는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재러동포 2세였다.

예정된 회견 시간은 30분이었다. 통역 김성우의 기록에 따르면, 접견실로 들어서는 레닌은 활달했다. 일제히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조선 대표단에 가깝게 다가와 한 사람씩 악수했다. 그의 첫 발언은 “고려공산당과 만나니 참으로 기쁩니다”였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손님 일행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이동휘가 조선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혁명운동의 여러 문제를 솔직하게 묻겠다고 했고, 레닌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양쪽 사이에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일제의 식민정책, 고려공산당의 내부 상황, 3·1혁명 운동의 특성, 조선혁명 투쟁 조건 등의 얘기가 오갔다. 레닌은 특히 조선에 부설된 철도선과 산업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조선인들은 책상 앞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면서 레닌의 질의에 답했다.

담화 중에 비서관이 들어왔다. 회견 시간이 다 지났다고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은 여유 시간이 25분 있으니 좀더 얘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회견 시간은 1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회견 말미에 양쪽은 작별 인사를 했다. 레닌은 대표단장 이동휘의 손을 굳게 쥐고 오랫동안 석별의 정을 표했다.3) 그때 레닌은 51살, 이동휘는 48살이었다.

이동휘·레닌 회견기를 남긴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김아파나시). 임경석 제공

이동휘·레닌 회견기를 남긴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김아파나시). 임경석 제공

레닌의 지지가 불러온 악의적 풍문

이동휘는 레닌과의 담화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뒷날 국내 신문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말하기를, 그날 레닌은 다섯 개 요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테러 정책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일본 노동계급과 연대할 것. 셋째, 대중에 대한 선전과 조직에 노력할 것. 넷째,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철도가 큰 역할을 했음에 주목할 것 등이었다. 끝으로 가장 깊은 감화를 줬던 것은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한 견해였다. 레닌은 조선혁명의 첫 계단이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지적했다.4) 레닌은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이동휘 그룹의 견해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가 어떤 맥락 속에 형성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이동휘 그룹이 성취한 조선 사회주의운동 주도권을 자파의 수중으로 옮기기를 바랐던 경쟁자들,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이동휘에 대한 악의적 풍문은 그들에게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 풍문이 지속해서 유포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가로놓여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1930년대 초 사회주의 잡지 의 성격과 지향’, 전명혁, 34, 2018.
2. , 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 (개정4판), 96~97쪽, 1992.
3. ‘레닌과의 회견기’, , 김아파나시, 1929년 1월22일. , 김블라지미르 지음, 조영환 옮김, 국학자료원, 177~180쪽, 1997.
4.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5)’, 이동휘, 1925년 1월22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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