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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면 다인가

아론 라자르 <사과에 대하여>
등록 2020-01-25 14:46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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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끼쳤을 때 사과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사과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지 않냐고? 되지 않는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자체는 사과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사과는 피해자에게 말로 표현하기 이전부터 시작돼야 한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양심의 가책 같은 처참한 기분을 직면하고, 피해자에게 ‘우월한 지위’를 돌려주기 위해 어떻게 보상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한 뒤, 후회와 해명을 표현하는 과정이 사과다. 정확하게 사과하려면 인정, 후회, 해명, 보상이 모두 담겨야 한다.

(바다출판사)를 펴낸 아론 라자르는 수치심과 모욕의 심리를 집중 연구한 정신과 의사다.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의과대학 학장과 보건연구센터장으로 일한 경험은 그에게 아우성쳤다. “현장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모욕감으로 받은 상처와 피해를 치유하거나 줄이는 데 사과가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8명의 아이를 입양한 양육자로서의 삶도 사과의 힘을 확신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과가 중요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모욕감과 원한을 해소하고, 복수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며, 감정이 상한 이들의 용서를 이끌어낸다.”

라자르는 사과하는 법을 소개하기 전에 잘못 사용하는 말들부터 짚는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크게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합니다’ ‘잘하다가 어쩌다 한번 실수한 거죠’ 이렇게 말했다면 실패한 사과다. 조건부로 죄를 인정하거나 피해자의 예민함이 문제라는 뉘앙스를 풍겨선 안 된다.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만한 자세로 사과하면 안 된다. 라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건 후회와 반성이 없는 가짜 사과다. 실패한 사과는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한다. 그래서 더더욱 실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당신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과의 언어는 ‘절대적’일수록, 간결할수록 품격 있다고 그는 조언한다. 사과할 시점에 관한 안내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무조건 빨리 하는 사과가 다 좋은 것도 아니란다. 충분한 자숙의 시간을 거친 뒤라야 피해자도 가해자의 사과에 공감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사적 사과만큼 공적 사과를 중요시해 역사 속 사과 사례 1천여 건을 분석한 통찰은 독서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독일인이 나치의 만행에 대해 가지는 책임감부터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까지 두루 살핀다. 공공 영역에 한해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과오에도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명문. “자신이 가담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것처럼(국가가 이룬 성과, 국가대표 스포츠팀의 우승 등) 불명예(그러나 죄의식은 아닌)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 제국주의 시대 강제노역 등 과거의 과오로 반사이익을 얻은 수혜자들은 고통당한 이들을 향해 도덕적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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