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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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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에 낼 수 없는 진심

시력이 떨어져 안과 검사를 하다
등록 2020-01-22 02:21 수정 2020-05-02 19:29
서울 시내 한 대형 종합병원 로비.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시내 한 대형 종합병원 로비.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해 가을 내가 진단받은 다카야스동맥염은 원인도 알 수 없고, 치료제도 없고, 언제 나을지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생명에 위험한 혈관의 염증 수치를 빠르게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고용량 스테로이드제가 유일하다고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스테로이드제를 많이 복용하면 다양한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얼굴형이 바뀌고(둥글게 부풀어오른다), 몸이 붓고,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다모증이나 탈모가 일어나고, 안압도 높아진다. 스테로이드제를 먹자 이런 온갖 증상이 일어났다. 2~3주에 한 번씩 만나는 주치의 선생님에게 시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바로 안과 진료를 예약해주셨다.

안과는 큰 대학병원의 구석진 곳에 있었다. 눈이 몸의 구석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안과를 발견하는 것부터가 시력 테스트란 의미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기실에 앉았다. 시력 검사와 안압 검사를 거친 뒤 1시간가량 기다렸다. 의사 선생님은 산동제(동공을 확장시키는 약)를 넣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오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답게 얌전히 끌려다니면서 네모난 흰색 기계들 앞에 앉아서 검사받았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거친 뒤, 진료실 앞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안압이 너무 높아요. 이대로 스테로이드제를 계속 복용하면 한 달 안에 시신경이 죽을 거예요.”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선생님이 함께 온 엄마를 쳐다보고 말했다. 환자는 난데,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혹여 상심해서 쓰러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얼굴이다.

“죽은 신경은 되돌릴 수 없어요.”

나는 주먹을 꼭 말아 쥔다.

“당장 약을 끊어야 해요. 교수님? 언제 뵌다고요?”

엄마가 차분하게 3주 뒤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다.

“당장 예약을 잡으세요…. 아니, 조만간이 아니라 당장! 오늘이라도, 빨리요.”

나는 눈을 강하게 깜박거린다. 눈을 떴다 감는 법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꾹꾹 소리가 날 것처럼.

“스테로이드제 반응이 너무 강해요. 저는 스테로이드제 때문에 실명된 사례도 봤어요.”

감정이 얼기설기 밀려온다. 최후의 보루처럼 아껴둔 말을 스스로 되뇔 차례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내 탓이 아니야.’

의사 선생님의 얼굴은 굳어 있다. 신경질적이고, 약간 놀란 듯도 하다. 선생님이 원래 예민한 분인 걸까, 아니면 오늘따라 댁에 걱정할 만한 우환이라도 생긴 걸까 궁금했는데. 아, 그냥 환자가 한숨 나오는 상태였던 거군요.

병원에서 나와 자동차 창밖을 바라봤다. 스쳐가는 나무들의 잔상 하나하나에 실명한 사람들 명단을 매겨보았다. 루이 브라유, 헬렌 켈러, 심봉사, 메리 잉걸스…. 어떡하지,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못난 마음이지만 나는 두 눈 다 보여서 다행이다, 하고 안도했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대단해지고 싶었지만 이렇게 찬란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을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처럼 약한 사람이 보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을, 나를?

다음 날,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스테로이드제를 급하게 줄였다. 아침저녁으로 안과에서 처방받은 점안약도 넣었다. 일주일쯤 뒤 안압이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는 검사 결과를 들었다. 그날 저녁, 언니가 물었다. 시력을 잃을 뻔한 건 어떤 느낌이냐고. 공포가 실체를 가질까봐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입 밖에 내기에는 너무 무거운 진심이었다.

신채윤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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