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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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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 임동규–고세혁 실화였나

감독 차에 돌 던진 선수, 에이전트로 변신한 야구 관계자

야구 전문 기자가 본 ‘허구지만 진짜 같은’ 드라마 이야기
등록 2020-01-20 03:59 수정 2020-05-02 19:29
인천 문학경기장 외야석에서 야구팬들이 경기를 즐기고 있다. 한겨레 자료

인천 문학경기장 외야석에서 야구팬들이 경기를 즐기고 있다. 한겨레 자료

“우리는 야구를 못합니다.”

“우리는 야구를 드(더)럽게 못합니다.”

“우리는 몇 년째 야구를 드럽게 못합니다.”

드라마 대사지만 왠지 몰입된다. 응원하는 팀이 몇 년간 암흑기를 보낸 구단(들) 팬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머릿속에 특정 팀(들)이 떠오른다고? 그 팀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현실을 걸쭉하게 녹인, 허구지만 진짜 같은 드라마니까.

선수·승진·낙하산 아닌 ‘백 단장’ 없지만

프로야구 시즌은 일찌감치 끝났는데 야구 커뮤니티는 후끈 달아올랐다. 프로야구 구단의 오프시즌 이야기를 담은 SBS 드라마 (극본 이신화, 연출 정동윤) 때문이다. 스포츠 드라마는 경기 방식과 규칙 이해 등의 장벽으로 팬들 외의 시선을 붙들기 어려운데도 는 예상과 달리 시청률과 화제성 면에서 꽤 순항 중이다. 1회차 5.5%(닐슨코리아 집계)로 시작해 9회차에 15%를 넘어섰다. 10% 시청률을 넘기기 어려운 요즘 드라마 시장에서 꽤 인상적인 수치다. 또 다른 야구 드라마도 추진된다는 소식이다.

는 같이 선수 중심으로 사건을 풀어가는 정통 야구 이야기가 아니다. 야구 자체가 아니라 야구단 운영 시스템과 그 안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만년 꼴찌에다 경기 중 더그아웃에서 코치들끼리 주먹다툼까지 벌이는 막장 야구단인 드림즈의 백승수 신임 단장을 중심으로 내년 시즌 전력 보강과 팀 체질 개선을 위한 치열한 물밑 싸움을 그린다. 고질적인 비리는 과감히 쳐내면서 다음 시즌 희망을 싹 틔운다.

‘스토브리그’라는 드라마 제목도 그래서 나왔다. 스토브리그는 미국프로야구(MLB) ‘핫 스토브리그’를 줄인 말로,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올 때까지 오프시즌 기간을 뜻한다. 겨울에 뜨거운 난로(hot stove) 주변에 앉아 트레이드(선수 이적이나 교체)나 연봉 협상을 벌인 데서 유래했는데 미국에선 보통 ‘핫 스토브’라고만 표현한다.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가 “야구단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평한다. 한 예로 백승수(남궁민) 단장의 동생이 야구 커뮤니티에 데이터에 기반을 둔 분석 글을 자주 올리다가 구단 전력분석팀에 합류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반 직장인이면서 유명 야구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팬이었다가 이를 눈여겨본 한 구단에서 특채한 이가 있었다.

현장 코칭스태프와 전력분석팀 사이의 갈등도 으레 있는 일이다. “현장 사정도 모르면서” “공 한 번 안 던져봤으면서”라는 말은 구단 내에서 늘 흘러나온다. ‘선수 출신’과 ‘비선수 출신’의 갈등과 반목은 비단 야구단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구단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렇다면 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일단 백승수처럼 야구를 전혀 모르는, 그리고 모그룹 낙하산이나 내부 승진도 아닌 단장 선임은 지금껏 거의 없었다. 성민규 롯데 자이언츠 신임 단장이 구단 밖에서 채용된 조금은 특이한 사례인데 그 또한 프로구단 지명까지 받았던 야구 선수 출신이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해설가로 활약했다.

성 단장을 포함해 현재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7개 구단이 선수 출신 단장이다. NC 다이노스(김종문), 키움 히어로즈(김치현), 삼성 라이온즈(홍준학) 단장은 비선수 출신인데 이들은 모두 내부 승진을 했다. 임은주 전 히어로즈 단장이 야구와는 전혀 무관했던 축구 선수, 심판, 축구단 단장, 최고경영자(CEO) 출신인데 강원 FC의 CEO 시절 때 비리 의혹이 제기되며 부임 열흘 만에 물러났다. 임 전 단장은 한국·미국·일본 통틀어 첫 여성 프로야구단 단장이기도 했다.

프로야구단 운영팀장이 여성인 적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운영팀장은 선수단과 계속 함께하는 매니저를 비롯해 스카우트, 전력분석팀 등을 두루 거쳐야 하는 요직이다. 현장과 소통이 제일 중요한 구단 살림꾼인데 현재까지 매니저를 한 여성 직원조차 없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자가 더그아웃 취재를 마치면 소금을 뿌릴 정도로 남성 중심의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야구단이다. 그래도 “향후 10년 내 여성 운영팀장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는 야구인도 있다.

(왼쪽부터)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나오는 이용우(길창주 역), 조병규(한재희), 남궁민(백승수), 박은빈(이세영). SBS 제공

(왼쪽부터)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나오는 이용우(길창주 역), 조병규(한재희), 남궁민(백승수), 박은빈(이세영). SBS 제공

100만원에도 꼬이는 치열한 연봉 협상

드라마 에서 임동규(드림즈)와 강두기(바이킹스)의 트레이드처럼, 주축 타자와 1~2선발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최동원(롯데)-김시진(삼성) 트레이드처럼 선수협회 결성 추진으로 구단에 밉보여, 팀 주축 선수가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한 사례는 있었다. 2001년 초 있던 심정수(두산)-심재학(현대) 트레이드도 비슷했다. 우즈, 김동주와 함께 ‘우동수 트리오’로 불렸던 심정수는 2000년 말 선수협회 사태 핵심 멤버로 주홍글씨가 새겨지며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선수협’이라고 하면 모그룹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때였다.

자유계약(FA) 선수 영입과 더불어 비시즌 때 구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소속 선수 연봉 협상이다. 팀 성적대로, 개인 성적대로 기준이 제각각이라서 감정싸움이 벌어지기 일쑤다. 일반적으로 저연봉 선수는 운영팀이, 고연봉 선수는 단장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 2018년부터 대리인(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되면서 에이전트가 대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한다. 어떤 선수는 시즌 성적과 언론 보도 등을 모은 자료를 뽑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선수는 무조건 타 구단의 같은 포지션 선수보다 더 달라고 읍소하기도 한다. 100만원 차이 때문에 협상이 금방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에서처럼 술집에서 컵을 벽에 던지는 극단적인 사례(다른 일로는 있었지만)는 물론 없다. 구단이나 선수 모두 적절하게 ‘선’은 지키는 편이다.

몇 년간 성적이 안 났다고 에서처럼 선수단 연봉 총액을 30% 삭감한 경우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에도 없었다. 당시 모그룹이 휘청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 1998시즌 연봉 총액이 17억5350만원이었으나 이듬해 13억7800만원으로 줄어든 바 있다. 연봉 총액 면에서 21.4% 줄었는데, 에서처럼 선수단 규모(50명)를 유지한 채 개별 연봉을 깎은 게 아니었다. 49명 선수단 규모를 40명(외국인 선수 제외)으로 축소하면서 줄인 연봉 총액이었다.

선수단 규모(52명)는 유지한 채 연봉 총액을 29.5% 낮춘 사례가 있기는 했다. 2008년 현대 유니콘스 인수 뒤 재창단한 서울 히어로즈의 첫 시즌(2008년) 연봉 총액은 29억1200만원이었다. 전년도 현대 유니콘스 연봉 총액(41억2970만원)보다 크게 삭감된 액수다. 송지만(6억원→2억원), 김동수(3억원→6천만원), 전준호(2억5천만원→7천만원) 등 베테랑들의 연봉을 대폭 깎은 데 따른 결과물이었다. 구단이 이처럼 연봉을 대폭 삭감해도 선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FA 자격 취득까지는 팀 이적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연봉 조정 신청이 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다.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는 어떨까. 외국인 선수와 계약할 때 보통은 스카우트팀이 미국 등 현지에서 찍은 영상을 국내에서 단장, 감독, 담당 코치 등이 함께 보고 결정한다. 현지 계약은 스카우트팀에서 진행한다. 시즌은 물론이고 비시즌에도 단장이 직접 외국인 선수를 보러 가는 일은 드물다. 팀마다 다르지만 보통은 스카우트 팀장이 움직이고 에서처럼 운영팀장은 따라나서지 않는다. 참고로 일부 구단은 드라마처럼 팀장급은 사규대로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탄다.

청소년대표를 거쳐 미국 진출 뒤 국적을 포기한 백차승이 떠오르는 로버트 길(길창주)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라도 국내 구단 입단은 어려울 듯하다. 자생력이 없는 국내 야구단은 모그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 모그룹은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군대’ 문제가 걸려 있는 로버트 길을 품는 데 동의할 리 없다. 백차승만 하더라도 여론을 고려해 현재 ‘코치’가 아닌 ‘인스트럭터’(임시 지도자) 신분으로만 두산에 있다. 로버트 길 같은 휴먼 스토리는 드라마라서 가능하다.

에서 다루는 소재는 다분히 사실적이다. 트레이드에 반발한 선수가 단장 차를 부순다거나 구단에서 쫓겨난 뒤 앙심을 품고 연봉 협상을 방해한다는 식으로 다소 과한 설정이 분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 감독 차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앙갚음했던 선수가 있고, 구단에 물의를 일으키고 물러나 에이전트로 변신한 사례 역시 존재한다. 같은 팀 선수들끼리 멱살잡이하기도 했다.

현실에도 ‘의리파’ 강두기는 있다

강두기 같은 의리파도 있고 연봉이 대폭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고심하는 장진우 같은 베테랑도 있다. 더 나아가면 모그룹 이미지 제고를 위해 야구단을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있음직한 현실적 서사에 기반을 둔 강한 흡입력, 그것이 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중심축은 백승수 단장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가 맨 처음 “배부른 돼지”라고 생각했던 드림즈 구단 직원들이 있다. 운영팀, 스카우트팀, 전력분석팀, 마케팅팀 등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야구단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고 절치부심한다. 시즌이 선수 몫이었다면 비시즌은 그들의 몫이다. ‘스토브’는 그런 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열정은 비단 선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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