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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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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게 그리울 땐 ‘빨강머리 앤’

17살의 희귀난치병 투병기…

스스로 행복해지는 마음이 나에게도 있기를
등록 2020-01-09 01:52 수정 2020-05-02 19:29
<빨강머리 앤>(사진)

<빨강머리 앤>(사진)

나는 노란색을 좋아하고,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하는 17살 사람이다. 뛰어노는 것보다는 집이나 카페처럼 따뜻한 곳에 앉아서(또는 누워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의 고즈넉함을 좋아한다. 책을 읽고 웹툰 보고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손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런 무수한 특징 중에서도 희소성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가장 첫 번째로 꼽힐 특징은 단연코 다카야스동맥염(Takayasu’s arteritis)을 앓는 경험이다. 지난 9월26일, 발병 원인도 알 수 없고, 너무 희귀해서 아무도 어떤 식으로 아플 것이고 어떻게 나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지 못하는 이 낯선 병을 진단받았다.

일주일간 입원한 뒤 10월 초 퇴원하자, 당연하던 일상들이 물을 손에 한 움큼 쥐었을 때처럼 손쓸 수 없이 빠져나갔다. 퇴원 다음날인 토요일, 입원으로 학교를 비운 나에게 월요일 제출 마감인 과학 수행평가 일정이 공지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목 놓아 울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입원 기간으로 내 일상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도 애써 화를 참는 중이었는데, 그 공백에 대한 책임까지 나에게 지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 목적지가 없는 원망과 눈앞을 새카맣게 만들어버리는 절망을 토해냈던 기억이 난다. 이때만큼 강렬한 상실감이 날 휩쓸어가도록 하진 않았지만, 이 병 때문에 놓친 것들은 간간이 그러나 끊임없이 씁쓸한 우울로 나를 두드렸다. 초조함과 슬픔, 애써 나를 다독이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마음 둘 구석이 필요했다. 옛날의 향수라도 붙잡고 싶어서, 책을 읽던 당시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노골적인 그리움으로 을 집었다. 오랜만에 만난 앤은 기대보다 충실하게 나를 받쳐주었다. 많은 것을 동경하지만 초록 지붕 집의 앤인 것을 행복해하는 앤을 발견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그런 모습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울함을 잠시 덮고 앤처럼 나아가보기로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행복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일이든 오래 곱씹고 결론짓는 것을 좋아한다. 그 결론이 다분히 철학적이고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들어맞으면 흡족해한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도 좋다. 매일이 혼란스럽고, 나를 둘러싼 주변이 항상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런 상황에 놓여서 많은 생각을 하는 나를 좋아할 수 있는 내가 나는 정말로 좋다.

살아가는 것은 넓은 바다에 홀로 뜬 배를 저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배를 타고 가다보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겠지. 때로는 축제처럼 즐겁겠지만 난파되어 흩어진 배의 한 조각을 붙잡고 신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지나가는 것이 전부이다. 내가 쓸 글은 자신의 결심에 충실하고 있는지 스스로 평가하기 위한 보고서이다. 내가 나인 것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꿋꿋이 오늘을 살아가는지 지켜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적어놓으려고 한다. 100만 명 중에 2명 걸린다는 병을 앓고 있는 나라는 희귀한 사람을 알게 됨으로써, 길 가다가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는 것처럼 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하루에 예상치 못한 행복이 찾아갔으면 좋겠다.

*2020년 17살이 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신채윤 학생의 ‘노랑클로버’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원고 마감 스트레스가 치료에 부담을 줄 수 있어서 부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신채윤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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