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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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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욕먹고 싶다

공공선에 반하거나 경우 없는 언행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니까 ‘쓴소리’
등록 2020-01-07 20:08 수정 2020-05-02 19:29
내 집 장만에 나선 사람들로 견본주택이 북새통을 이루고있다. 연합뉴스

내 집 장만에 나선 사람들로 견본주택이 북새통을 이루고있다. 연합뉴스

지하철 환승역에서 퇴근길인 아이 친구 아빠를 만났다. 한동네 오래 살며 애들 어릴 때는 같이 밥도 먹고 놀러도 가던 사이다. 그는 최근 우리 동네 옆에 새로 들어서는 거대한 규모의 재개발 단지 얘기를 꺼냈다. 무순위 청약이라도 넣어보라고 했다. 거기서 살 것도 아니고 돈 쌓아놓고 사는 것도 아닌데 뭔 소리냐, 했더니 다들 여기저기 담보대출 등을 알아보고 있다며, 전세가는 어느 정도일지 예상 집값 상승률은 얼마일지 읊었다. 마지막 남은 몇 안 되는 ‘줍줍’(줍고 줍는다의 줄임말로, 미계약·미분양 주택을 사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갭 투자를 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르르 달려드니 분양가가 천정부지로 뛸밖에. 진작부터 문제가 많았다. 최소 분양 자격인 인근 지역 몇 년 거주 요건을 쉽게 풀어버리는 바람에, 전국에서 돈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이 거주 자격을 획득하려고 앞다퉈 전·월세를 계약하니 그 바람에 전·월세가가 폭등했고 이어 집값마저 폭등한 상황이다. 울며 떠난 이웃이 한둘이 아니다. 수도권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일대가 겪는 일을 나도 몇 년째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 와중에 “안 하면 손해”라니…. 설렁설렁 인사하며 헤어지면 될 것을,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는 결국 한 소리 했다. “○○ 아빠, 너나없이 그러니까 집값이 이렇게 미친 거잖아요. 나중에 우리 애들은 집 한 칸 갖기 지금보다 더 어려워져요.” 상대의 표정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선의였을 것이다. 내가 꽤 좋아하는 유순한 이웃이다. 자기도 할 거니까 같이 하자거나, 어쩌면 자기는 어려우니까 나라도 하라고 권한 것일지 모른다. 이런 이웃에게 면전에서 꼭 그래야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래야 할 때는 그래야겠다. 며칠 전 다른 이웃에게도 대낮에 같은 주제로 비슷하게 대응한 적이 있다. 쥐어짜 말해놓고는 내가 더 놀라서 화제를 돌렸는데, 그때만큼 가슴이 두방망이질하지는 않았다. 할수록 연습이 되나보다.

새해를 앞두고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의 푸념을 듣다가도 ‘싫은 소리’를 했다. 시집 일에 손위 두 형님네는 뭘 했네 덜 했네 하는 내용이었다. 이 친구는 시집 일뿐 아니라 친정 일에도 이렇게 형제자매 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시시콜콜 계산기를 두드리는 편이다. 가만 보면 자기가 할 몫은 철저히 n분의 1이고, 받을 몫은 두루뭉수리 형편대로(라고 하고 결국 내가 더 많이)였다. 참으로 편의적인 잣대였다. ‘그렇구나 어법’과 ‘나 어법’을 섞어서 결국 말하고 말았다. “네 마음이 그랬구나. 그런데 내게는 네 위주로만 대처하는 거로 보여.” 되도록 곱게 말했는데 친구는 처음엔 못 알아듣다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오랜 사이니까 넘어간다고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얘기했단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더 친한 건 아니다.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관성 때문에, 엮인 인연 때문에, 속내를 더 모르거나 못 드러내기도 한다. 결혼한 지 20년쯤 되었으면 그 정도 일은 할 만하면 알아서 감당하거나, 아니라면 진작 교통정리를 했어야지 언제까지 만만한 친구들 붙잡고 징징댈 것인가. 게다가 오랜만에 귀한 시간 낸 친구들의 대화가 이런 주제에 묻히는 건 진짜 옳지 않다.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당사자에게 나 하나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의 ‘쓴소리’는 그냥 하고 싶다. 단체대화방에서 헛소리하는 사람이나 여럿 모인 자리에서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이에게도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로 넘어가지 않으련다.

취향과 호불호 정도는 서로 어긋나도 괜찮다. 내세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공공선에 반하거나 경우 없는 언행에 대해서는 묻고 따지련다. 인생의 ‘짬’이라면 이런 거 아니겠나. 반백 년 정도 살았으면 이 정도 욕먹을 각오는 하고 사는 게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대신 최대한 다정하고 우아하게… 욕먹고 싶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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