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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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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등록 2019-12-23 02:42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도마뱀은 숨죽여 앉아 있었다. 민경은 척추로부터 흐르는 모든 신경이 보풀처럼 바짝 일어난 채 꾸역꾸역 진술서를 써갔다. 오랜만에 장시간 잡은 펜에 검지가 아릿해질 때쯤 목을 슬쩍 세워보니 김 팀장과 한 팀장, 유 대리의 숙인 뒤통수가 보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뒷목을 저릿하게 타고 오른다.

-솔직히 쓰시면 됩니다. 어차피 현장 직원들에게도 다 받을 거예요. 익명성은 보장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소파에 몸을 기댄 감사는 다소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이 순간 도마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꼬리를 떼어간 진범이 어떤 놈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까?

도마뱀의 죄목은 참으로 유치하고 별 볼 일 없다. 법인 차량의 개인 용도 사용. 감투 쓴 양반들에게 대수롭지 않을 일이었다. 감사에 일러바쳐도 코웃음이나 안 치면 다행이라고, 민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도마뱀은 말이 없다. 그는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다.

감사는 도마뱀의 눈앞에서 직원들의 진술서를 취합하고 스캔하여 실장의 이메일로 송부했다. 도마뱀은 눈알을 굴리지도,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본인에 대한 진술서들이 윗선에 보고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에 집중이 되는 날과 안 되는 날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멍하니 쉬고 싶다가도 일이 그릇에 낀 물때처럼 거슬려서 빡빡 문질러 닦아내어야 하는 날이 있고, 반대의 날도 있었다. 제철 메뚜기처럼 빳빳한 양복을 차려입은 감사는 곧 떠나버렸지만, 남겨진 자들은 불편한 고요 속에 남는다. 오늘은 불편하지만 묘한 들뜸과 두근거림으로 명백히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날이었다.

-다들 수고했어.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자.

한 팀장은 설익은 대봉이라도 베어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마자 도마뱀이 말없이 퇴근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나선 지 몇 분 뒤의 일이었다.

-팀장님, 출금 때문에 내일 출근하자마자 은행 좀 다녀올게요.

-나가는 김에 우체국도 들러 전표도 송부하면 좋고.

민경의 이야기에 한 팀장은 소소한 심부름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그것도 좋다. 할 일을 얹어주어도 번거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날이다.

-까아! 줘!

갓 15개월이 된 승현은 점점 고집과 떼가 심해졌다. 어제는 친구의 팔을 물어 이빨 자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퇴근하자마자 물린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해 사과해야 했다. 민경은 바닥에 누워 치어처럼 파닥거리는 승현을 보며 하품을 했다.

찹쌀떡 같은 탱탱한 볼을 부풀린 채 승현이 민경을 바라본다. 물먹은 이불처럼 소파에 늘어진 민경의 눈은 움직이는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덮어씌우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일일 수용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가변적일 것이다. 출퇴근 시간까지 하루 11시간, 이 시간을 듣고 보고 말하고 산출하다보면 민경은 언제나 수용치를 다 소진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일찍 퇴근하건 혹은 늦게 퇴근하건 그 패턴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리고 승현. 그리고 모성. 그것이라고 가변적이지 않을까?

어느 날 심성 뒤틀린 메피스토가 나타나 아이와 너의 목숨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민경은 두말없이 승현을 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작은 아기가 질리기도 하고 버겁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무화과를 먹으면 입안에 진득하게 남는 씨앗의 텁텁함처럼 첫맛부터 끝맛까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 육아의 현실이었다.

승현! 작고 고집 센 이 아이는 민경이 옷을 벗고 맨가슴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탐식하며 파고들 희고 둥근 엄마의 유방을, 마치 요망한 쌍두사라도 되는 듯 질색했다. 승현이 맨가슴을 보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민경은 깔깔깔 웃었다.

출산 96일. 승현은 아파트 옆 라인 1층의 가정 어린이집에 맡겨지고, 민경은 양배춧잎으로 유방을 감싸고 팔로델정을 먹으며 구역질을 해댔다. 승현이 그토록 엄마의 맨가슴에 질색하는 것은, 실리콘 젖꼭지를 거부하고 허겁지겁 엄마의 젖을 물었을 때 느껴진 강한 쓴 약의 맛에 세상 잃은 듯 울어대던 기억 때문이리라고, 민경은 생각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분유를 한 번 더 먹이고 재우면 승현은 잠이 든다.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과 툭 튀어나온 이마를 감상하며 그녀도 잠이 든다.

그리고 좀 더 밤이 깊으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님이 찾아온다.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밤손님은 집주인들이 깰까봐 안방에 고개도 내밀어보지 않고, 조용히 샤워하고 머리를 감고 작은방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또 야근이야?

-나라고 어쩌겠냐. 내가 사장이냐? 네가 나 대신 우리 사장한테 좀 말해줘. 누구는 집에 가기 싫어서 안 가는 줄 아냐. 너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스트레스 받아.

-나 진짜 힘들어. 일하고 육아하고 살림하고 진짜 몸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아.

-내가 주말에 도와주잖아. 야, 이러다 나 까딱하면 육아휴직 쓰게 생겼다.

-갑자기 육아휴직은 무슨 육아휴직?

-사정이 안 좋아 감원을 해야 하는데 애 있는 남직원들 대상으로 그런 거 권하는 분위기가 있어.

차라리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봤다가, 도저히 민경의 급여와 남편의 육아휴직 급여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다는 계산에 이후 말을 안 했다.

사랑. 어찌 가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민경은 여전히 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샘솟는 사랑은 온천수처럼 매끈거리지 않는다. 쓴소리를 하며 푹푹 파내기도 하고, 되로 받아 푹푹 파이기도 한다. 이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쟁기가 필요하고 땀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돈. 돈. 돈.

-민경 주임, 오늘은 표정이 안 좋네?

다음날 출근해서부터 미수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한 팀장이 커피를 마시며 뒤에서 얼쩡거렸다.

-아침을 급하게 먹어서 좀 체했나봐요.

-애 밥 먹이고 준비시키고 출근하느라 정신없지? 나도 그맘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몰라.

그룹웨어를 뒤적이던 유 대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앗 하는 외마디를 내뱉었다. 올 것이 왔구나, 민경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팀장님 인사 떴어요!

민경은 슬쩍 비어 있는 지사장실을 바라보았다. 도마뱀은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오늘 연차를 썼다. 그가 이곳에 발령받은 지 3년 만에 쓴 첫 진짜 연차였다. ‘진짜’를 수식어로 붙이는 이유는 ‘가짜’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가령 가짜로 연차를 쓰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룹웨어 공지사항에 붉은색 NEW 표시를 달아놓고 큼지막하게 떠 있는 ‘인사발령 19-25호’를 클릭했다. 로딩 시간이 꽤 걸리는 동안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한 팀장은 민경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번 홀짝였다.

-허어….

도마뱀의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한 팀장이 머리 아프다는 듯 미간을 누르며 제자리로 떠났다. 죄목이 징계위원회감은 아니기에 징계는 내려지지 않았다. 갓 꼭대기를 우스꽝스럽게 잘라버렸을 뿐이다.

직위 해제.

-내일이라. 책상부터 빼야겠네요. 사무실에 남는 자리 없으니 창고에라도 넣어야죠.

김 팀장이 미묘한 억양으로 정적을 깼다. 직위해제이나 발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윗선의 뜻이 명확하다는 이야기이다. 자리 없이 투명인간으로 버티든지 나가든지 선택해라. 공개적인 압박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뱉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진술서를 썼다. 이 사건의 공범이라는 말이다. 설령 백지로 내었건 쓸데없는 글만 끄적거렸건 무죄판결은 나오지 않는다.

도마뱀이 없는 점심시간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요즘 뜨는 TV 프로라든지 연예인 스캔들 이야기를 나누며 직원들은 하하호호 웃는다. 아무도 식사 시간이 무거워지기 원하지 않는다. 민경은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도마뱀 때문은 아니다. 셋째가 늦둥이라 아직 고등학생이라던데, 퇴사하면 도마뱀은 뭐 해 먹고살까 따위의 쓸데없는 남 걱정 때문은 아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였다. 그러나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보아도 내 것이 아닌 남의 인생은 가볍게 씹어넘길 희극일 뿐이다.

조금 한적해진 오후, 어린이집 앱 알림을 확인해보니 문어 고깔을 머리에 쓰고 환하게 웃는 승현의 모습이 보인다. 뒤이어 어린이집 번호로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정부의 보육 방침 변경으로 지역 어린이집 전체가 파업한다는 문자였다. 불편하게 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정부 지침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에 대한 호소문이 쓰여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였다. 민경은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항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이 내 일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비열해지기 마련이다.

-오늘 밤에 어머니한테 승현이 데려다주고 와.

-왜?

-어린이집 파업한대.

-언제까지?

-나도 모르지.

연애 시절의 미사여구는 무덤 속에 있다. 그들은 지쳐가는 어느 순간부터 단문의 메시지를 선호하게 되었다.

-짜증 나네

-그러게.

다행인 것은 시가가 집과 한 시간 거리여서 비상시에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애가 젖을 못 먹어서 약하네, 아이를 네 손으로 키우지 왜 맡기니 등의 잔소리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남편과 몇 번 싸우다보니 귓등으로 듣는 재능이 생겼다.

사실 처가는 시가보다 훨씬 가까웠다. 2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민경의 남편은 승현을 처가에 맡기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처가를 싫어했다. 민경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멸시에 더 가까웠다. 민경의 아버지는 5년 전 교직에서 퇴직했다. 흔한 명예퇴직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하던 버릇을 시대가 바뀜에도 고치지 못한 탓이었다. 아들이 머리를 맞자 노발대발한 학생회장 엄마가 민경의 집까지 쫓아와서 욕을 퍼부었던 일이 생생하다.

-당신 자식이라도 이렇게 팰 거야? 이 미친 새끼야?

아버지는 당신 자식들도 잘못을 했으면 거침없이 매를 드시는 분이었다. 혁대와 파리채, 효자손, 구둣주걱과 운동화… 손에 잡히는 그 모든 것이 매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심하게 자식들을 때렸던 때는 고작 2년 전이었다. 처음 듣는 종교에 빠져 병역거부를 하겠다는 동생을 이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후려쳐서 심지어 경찰이 왔다. 늦둥이 남동생은 감옥에서 1년6개월간 복역 후 출소했다. 가족들은 한 번도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남편은 장인이 승현이 버릇을 잡겠다고 밥을 굶기는 모양을 한 번 보더니 명절 외에는 처가를 찾지 않았다.

-내일 새 지사장님 오신다니 자리 좀 정리해줘.

-물건은 어디로 뺄까요?

민경의 질문에 한 팀장은 음 하고 잠시 달력을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우선 박스에 넣어둬.

-노트북은 그대로 두고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문제군. 우선 회사 물품들은 놓아두고 개인 물품만 빼둬.

-캐비닛은요? 옷가지들이 걸려 있는데.

-놓아두고 그냥 책상만 깔끔히 치워줘.

민경은 노크 없이 지사장실에 들어갔다. 먹빛의 명패를 제일 먼저 상자에 넣고, 개인용 캘린더와 서적류도 넣었다. 살아 있는 자의 유품을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도마뱀이 갑자기 들어와 왜 내 물건에 손을 대느냐고 소리를 지르면 어쩌지? 일어나지 않을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옥돌 위촉패와 각종 대외 상장들이 눈에 띄었다. 훈장처럼 모아왔던 그의 자랑거리들을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지사장님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나가리지.

-노조에서 찌른 거예요?

-내치를 못한 죄지, 외치도 못했고.

-에이, 저번 지사장도 불법노동 행위라며 노무사 들락날락하던데 그걸 어떻게 통제합니까?

-법 위에 사람은 없는데 회사는 있거든.

김 팀장과 유 대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민경은 지사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갑자기 코를 덮쳐오는 역한 냄새에 토할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투박한 황색의 안경집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서랍을 열지 않아 냄새가 났던 모양이었다.

안경집을 열자 안에는 촌스럽고 알이 두꺼운 무테안경 하나가 있었다. 안경알 표면에는 먼지처럼 내려앉은 실금들이 보였다. 민경은 도마뱀이 3년 전 첫 발령을 받을 때 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아들이 새 안경을 선물해줬다며 지금 사용하는 안경을 차고 출근했다. 민경은 헌 안경집을 닫고 상자 틈새에 고이 넣어두었다.

-내일은 신임 지사장님 첫 출근이니까 우리도 빨리들 출근합시다.

한 팀장은 퇴근하며 민경과 유 대리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삑- 퇴근이 처리되었습니다.

남편은 오늘도 기대를 저버렸다. 가장 친한 선배가 끝내 사표를 썼다고 그는 술을 한잔하고 집에 들어왔다. 미친놈, 이기적인 새끼. 온갖 욕을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는 승현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가 그런 욕을 들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 아이가 많이 아파서요.

-오늘 지사장님 오시는 날이라 지시사항도 많을 텐데 좀 그렇긴 하네.

-오후에라도 나갈게요.

-아니야, 애가 아프다는데 어쩌겠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벌써부터 연차 쓴다고 하면 첫인상부터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어.

-죄송해요. 오후에 뵙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 반에 한 팀장과 통화를 마쳤다. 선의의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지렁이 같은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애를 본다고 하기에는 용건이 너무 길지 않은가. 오전에 남편은 점심시간을 빼서 아이를 시가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승현은 모처럼의 예상치 않은 방학에 신이 나는지 밥풀을 멀리까지 날려보내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오전 열한 시에 승현을 데리러 왔다. 그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기에 민경은 화를 풀었다.

민경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는 잠시 회사 근처 약국에 들렀다 출근했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뒤쪽 휴게실이 열려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민경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손님용 테이블에 사무실 직원들이 앉아 있었는데 낯선 인물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민경은 이를 보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리사무 보고 있는 오민경 주임입니다.

-아, 반가워요.

새로 온 지사장은 4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이런 지방이 아닌 서울 여의도에나 어울릴 것 같은 검은 슈트와 은색 손목시계로 치장한 그 남자는 무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전임 지사장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안경이었다. 그는 지사 현황을 보고받기도 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하며 오후를 보냈다. 오전에는 현장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모양이다. 민경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본사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특히 비용 절감 관련해서 아침 회의 때마다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예, 요즘 노조 일 때문에.

-한 팀장님, 그런 말투 좋지 않아요. 전에는 평직원들이 윗사람 눈치 보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윗사람도 평직원들 눈치 봐야 하는 세상이에요. 세상이 바뀌었어. 구설에 올라서 노조한테 찍히면 우리 같은 관리자는 보호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상… 상생을 해야 하는데, 참 어렵습니다.

-한쪽만 양보하는 건 안 좋은 거예요.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며 맞춰나가야지. 배고파 죽겠다는데 떡 한 쪼가리 안 줘서 주인에게 칭찬받겠다고 하다가 되레 토사구팽되는 거예요.

민경은 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갔다. 꼭 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여느 때처럼 일하다 퇴근했다.

그리고 날 좋은 주말이 되자 오랜만에 홀로 병원을 찾았다.

-마지막 생리가 언제라고 하셨죠?

-한 달하고 일주일 되었어요.

-배란이 규칙적으로 되었더라면 아기집 크기가 더 컸을 텐 데요.

-아기집이 보이나요?

-네, 여기 하얀 테두리 보이시죠? 그런데 피고임이 있어 조금 불안정하네요. 일주일 뒤에 와보세요.

초음파비로 삼만천 원을 지출하기 전 간호사가 아기수첩을 내밀자, 민경은 다음에 받아가겠다고 사양했다. 온통 화려한 금박을 입힌 VIP 마이너스통장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시댁에서는 좋아하실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은? 민경은 생각했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 가족은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 이미 생겼는데 준비라고 할 게 뭐가 있는가. 아기는 제 밥숟가락은 갖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회사에서 두 번째 출산휴가를 허락해줄까? 반년 전 세 번째 출산휴가를 쓰고 복직한 여직원이 왕복 두 시간 거리의 지사로 발령이 났다. 왕복 세 시간 거리 발령이 아니라면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했다. 내가 잘리면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남편은 이미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한 번 쉬면 다시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학생 시절 벌였던 낙태에 대한 찬반토론이 생각났다. 선택. 그래, 어른은 아기를 선택할 수 있지만 아기는 의지 없이 낳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했다. 나는 이 아기를 선택했는가? 아니, 선택하지 않았다. 생명!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수정의 순간은 아니다. 수정란이 인간이라면 많은 시험관 시술 병원은 비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착상인가, 심장이 뛰면 그때부터 인간인가. 그렇다면 난소에 착상해서 심장이 뛰는 아기, 즉 자궁외임신 치료는 왜 낙태라고 하지 않고 치료라고 하는가. 대체 언제부터 아기는 아기인가. 나는 언제까지 결정해야 죄책감 없이 이 아이를 보내줄 수 있는가.

음부를 뚫고 들어오던 초음파 진료기의 차가운 감촉이 떠올라 민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텍스 콘돔을 끼운 기계의 삽입은 섹스의 느낌과는 천지차이다. 들뜨지도, 열기가 오르지도 않고 차가운 진료대에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차가운 기계가 삽입되는 것을 보면 실험실의 개구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낙태! 조금 이르게 결정하면 약물이면 되지만 늦게 결정하면 몸속에 기계를 넣고 아이를 흡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약물로 죽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기계로 흡입하는 것은 인간인가. 민경은 메스꺼웠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 어린이집 파업이 장기화된다는 라디오 뉴스가 나왔다.

-오 주임, 이번 달 마감은 다 끝나가?

-네, 연말이라 좀 복잡하긴 하네요.

-지사 망년회도 한 번 해야 하는데 의견 취합 좀 해봐.

-네, 단톡방에 띄워볼게요.

네 개의 바퀴 중 하나가 불안정하면 세 바퀴도 영향을 받는다. 열두 바퀴 중 하나가 불안정하면 조금 덜하지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퀴가 수십 개 되면, 하나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느 평범한 날처럼, 어느 날도 그렇게 흘러갔다.

도마뱀은 새로운 집이 생겼다. 그는 이제 ‘도 지사장’이 아니라 ‘도 부장’으로 불렸다. 직책은 없고 직급만 있었다. 도 부장의 새로운 집은 인포메이션 데스크 뒤 휴게실 겸 탕비실이었다. 그곳에는 초라하고 낡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남의 시선이 쉽사리 닿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아주 조용히 생활했다.

-휴게실도 전처럼 못 쓰고 불편해 죽겠어.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뭐가 불쌍해. 저렇게 놀고먹고 월급은 우리 두 배로 받아가는데.

여직원들은 말이 많았다. 일부는 도 부장을 불쌍하다고 여겼지만, 대부분은 노조를 눈엣가시로만 여기던 높은 양반이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인과응보라고 여겼다. 때때로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는 도 부장을 보며 민경은 서글퍼지곤 했다. 그가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신임 지사장은 도 부장에게 인사는 해도 일절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한 팀장은 가끔 도 부장과 같이 퇴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창고 정리를 한다고 조용히 나선 도 부장이 떨어지는 서류철에 얼굴을 맞은 일이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쿵 소리에 처음 탕비실로 달려갔을 때 민경은 도마뱀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난 안경을 보는 도 부장은 굉장히 처참하고 곤란한 표정이었다. 노조에서 도 부장을 비난하는 글을 그룹웨어 익명 게시판에 올렸을 때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투명인간다운 행실을 성실히 해내던 도 부장은 부서진 안경알 조각이 자기 인생이라도 되는 듯 심각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밤, 승현을 데리고 조금 일찍 들어온 남편에게 민경은 병원에 다녀온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편은 기쁜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민경은 그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끝내 축하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날 민경은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승현과 한방에서 잤다. 남편은 밤이 깊도록 코를 골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네요.

-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유산이란 말입니다.

그날 밤 민경은 차가운 병원의 진찰 의자에서 다시 초음파 검진을 받는 꿈을 꾸었다. 의사의 말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꿈속에서 빈 거리를 민경은 터덜터덜 걸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 창밖에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찍 잠에서 깬 승현이는 제 검지로 창밖을 가리키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괴성을 질렀다.

-이렇게 같이 자는 것도 좋네.

-방 하나에만 불 넣으면 되니 가스비도 덜 들지.

-그러게. 이제 돈 더 아껴야겠네.

민경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어제처럼 속이 메스껍지는 않았다. 도 부장은 조금 늦었다. 출근 지문을 찍고 돌아선 그는 흰 안대라도 쓴 듯 김 서린 안경을 끼고 있었다. 오래전 쓰고 있었던 그 안경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섣불리 닦지 않고, 익숙한 탕비실로 더듬거리며 향했다. 찬 안경이 온기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앞이 보일 것이다.

-우리 지사에도 소급수당 받아야 할 여직원들이 있나요?

-가장 최근이 민경 주임입니다.

점심시간, 신임 지사장의 물음에 한 팀장이 민경을 슬쩍 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노조 게시판에 여직원 소급수당에 대한 승소 판결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출산휴가를 다녀온 여직원들이 일률적으로 전보다 낮은 연봉 등급을 적용받는 것에 대해 노조가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였다.

-그렇군요.

우주에 매달린 추가 된 기분으로 민경은 자신에게만 작용하는 중력을 견뎌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그것에 대해 민경의 의견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급수당은 얼마쯤 나올까. 많지는 않더라도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별로 기쁘지 않았다. 돈을 준대도 크게 기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양치를 마치고 민경은 손을 씻으며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늘어진 배가 몇 달 뒤면 남산처럼 볼록해질 것이다. 둘째는 더 일찍 배가 불러온다고 한다. 소급수당에 대해 묻던 지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물었을지도 모른다.

민경은 화장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속은 메스껍지 않았으나, 오늘따라 계단을 오르는 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는데 숨이 더 가쁘게 찼다. 창밖에서는 슬레이트판을 때리는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좋아 흩날리던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는 모양이었다.

-점심은… 드셨나요?

커브를 돌아 불쑥 튀어나온 도마뱀의 모습에 놀라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도마뱀은 한 손에 벌겋고 기름이 낀 국물이 담긴 컵라면 컵을 들고 있었다. 그의 안경은 더 이상 김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는 대답도 질문도 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더니, 민경을 지나쳐 제 길을 갔다. 그는 외로워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자유로워 보였다. 환청처럼 콧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도마뱀은 영락없는 도마뱀인 줄 알았으나, 도마뱀에게서 떨어진 꼬리였다. 그는 쓸모없어진 부품처럼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다시 도마뱀처럼 보였다. 꼬리가 떨어져 볼품없긴 하나 그는 여전히 네 발로 걷고 있었다.

민경은 사무실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컴퓨터들의 온기와 사람들의 소음에 둘러싸인 이 섬은 그녀가 점유하고 있었으나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민경은 자신의 삶이 부질없이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함부로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속이 메스꺼워야 했으나 메스껍지 않았다.

또 별 볼 일 없는 하루가 지났다. 따가운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민경은 오늘도 퇴근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노약자석에 자리가 났음에도 앉지 않았다. 쓸쓸하고 오지랖 넓은 노인들의 꾸중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민경은 생각했다. 척박한 자궁에 뿌리를 내린 것도 애초부터 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라난 꼬리일 뿐이다. 퇴근길 버스는 배려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린 대구포처럼 매달린 민경의 몸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했다. 엉거주춤한 모습은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어설프고 우스웠다.


수상 소감


사랑하는 것과 나이 들어가네요


최유미 제공

최유미 제공

어른이 되면 네 마리의 고양이와 여섯 마리의 강아지를 키울 거야. 냉장고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망베르 치즈를 종류별로 구비해두고, 밤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는 거야. 집은 열서너 평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게 외롭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나이 들어가는 거야.
행복한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되는 방법을 영영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염도가 낮은 어린이 치즈만 있을 뿐이고, 동물은 금붕어 두 마리밖에 없다. 집은 게으른 내가 혼자 청소하기에는 넓고, 아랫집에서 항의가 들어올까봐 깔아놓은 매트를 들어내면 바닥은 먼지구덩이가 따로 없다. 아이가 크게 아팠을 때 나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로 인해 직장까지 그만둔 뒤 세상에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없어 보일 때 주섬주섬 글을 잡았다. 에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나이 들어가고 있구나.
미숙한 내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과 관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정하고 가정적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딸, 아들에게도 고맙다. 또한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과, 남편을 키워주신 시어머님, 돌아가신 시아버님께도 감사드린다.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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