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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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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자고 간 너구리

을씨년스러운 저녁 희한하게 생긴 개 한 마리를 큰오빠가 데리고 오는데…
등록 2019-12-19 03:18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큰오빠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의 어느 날입니다. 하루는 막 뛰어오더니 말도 없이 빨래 장대를 들고 강으로 달려갔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족들도 함께 강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여울물이 끝나는 얼음물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려고 얼음을 짚으면 꺼지고 나오려고 또 얼음을 짚으면 꺼져 그저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허우적거리는 사람한테 긴 빨래 장대를 엎드려서 밀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장대 끝을 두 손으로 잡고 큰오빠가 끌어당겨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물이 금방 얼어붙어 뻣뻣한 사람을 업고 집으로 왔습니다.

얼음물에 빠진 나그네

안방으로 데려와 옷을 벗기고 아버지 바지저고리로 갈아입히고 아랫목에 이불을 있는 대로 다 모아 덮어주었습니다. 아랫목 병원에 입원한 겁니다. 안방 아랫목 병원의 의원은 어머니입니다. 환자에 따라 꿀물, 들기름, 조당숙(좁쌀죽)을 먹입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불을 때고 조당숙을 멀겋게 끓여 얼음물에 빠진 나그네에게 훌훌 마시라고 갖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눈 속에서 인동덩굴을 구해왔습니다. 어머니는 매달아놓았던 차조기와 꽈리, 밤, 대추, 인동덩굴을 넣고 아주 한 솥 달였습니다. 한참 푹 달인 다음에 건더기는 건져내고 꿀 약간과 흑설탕을 넣고 한소끔 끓였습니다. 감기 걸릴까 무서워서 얼음물에 빠진 나그네도 먹이고, 우리 식구들도 돌아가면서 한 술잔씩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에 나그네의 옷도 빨아서 말려야 했습니다.

나그네는 깊이 잠들었습니다. 온 식구가 설렁거리며 드나들고 저녁을 먹으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하고 잡니다.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 델까봐 이불을 깔고 아버지와 큰오빠가 들어 옮겨도 모르고 잡니다. 이불도 가볍게 덮어주었습니다.

온 집안 남자들은 동생까지도 다 안방에 모여 나그네와 같이 잤습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깨어난 나그네는 몸 둘 바를 몰라합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남의 집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집주인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잤으니 오죽 민망스럽겠습니까.

알고 보니 큰오빠의 선배인 광세 선배의 큰형님이랍니다. 오리 사냥을 왔는데 여울물에서 놀고 있는 오리를 빵 쏘니 총에 맞은 오리가 떠내려가다가 얼음에 걸렸습니다. 겨울에도 흐르는 여울물은 얼지 않습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하여 집 위쪽은 여울물이 흐르다가 우리 집 앞에서 여울이 끝나면서 잔잔하게 물이 고여 얼기 시작합니다. 여울물이 닿는 곳은 두껍게 얼지 못합니다. 그 얇은 얼음을 밟아 빠졌던 것입니다. 읍내에서 잘사는 광세 선배네 온 가족은 큰오빠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어떤 친척 집보다 우리 집에 잘해주어서 아직도 교류하며 살고 있습니다.

첫 추위가 난 아주 을씨년스러운 저녁입니다. 첫 추위에 얼면 겨우내 춥다고 일찍 제일 따뜻하고 넓은 안방에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큰오빠가 희한하게 생긴 개 한 마리를 안고 안방으로 불쑥 들어왔습니다. 식구들이 깜짝 놀라 동시에 “에구머니나, 그게 뭐나!” 소리쳤습니다. 큰오빠는 얼른 아랫목에 포대기를 깔아달라고 합니다. 너구리가 뭣 때문에 강을 건넜는지는 모르지만 가려고 하니 젖은 털에 자갈돌이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돌을 떼고 안고 왔다고 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장지문 뚫고 구경하고 관찰일기 쓰고

이번엔 너구리가 아랫목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너구리는 눈에 초점을 잃고 정신이 멍합니다. 넋이 나간 것 같습니다. 먹을 정신도 없는 너구리에게 메밀꽃차를 달여 약간 온기가 있을 때 수저로 입을 벌리고 떠먹였습니다. 너구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어서 무시래기도 갖다놓고 무도 먹기 좋게 토막 내서 갖다놓았습니다. 또 이따가 고구마도 갖다놓고 옥수수통도 따다놓습니다.

사람이 아랫목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함께 잤는데, 멀건 눈으로 사람이 무서워 벌벌거리는 너구리를 위해 방을 비워주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썰렁한 윗방에 모여서 안방 장지문 틈으로 너구리를 구경합니다. 식구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장지문을 자기 키에 맞게 뚫고 구경합니다. 동생은 관찰일기를 쓴다고 자기 앉은키에 맞게 문종이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너구리를 살핍니다.

“너구리는 진한 회색에 눈 주위와 주둥이 부분은 검은색임.

다리 중간부터 검은색이 섞이면서 발과 발가락이 검은색임.

네 개뿐이 안 되는 발가락은 길고 발톱도 강해 보임.”

너구리 길이를 잰다고 두 손을 벌려 문구멍으로 재보고 빨리 자를 가져와 두 팔 사이를 재달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재보니 한 50㎝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 이야기로는 세상 경험이 없는 어린 암놈 같다고 하십니다. 너구리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멀리서 볼 때는 너구리가 납작하다는 느낌을 늘 받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너구리는 개보다 다리가 훨씬 짧아서 기어다니는 것같이 보였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구리가 있는 방은 누릿누릿한 냄새가 납니다. 워리도 뒤란 쪽으로 난 뒷문 앞에 앉아서 코를 킁킁거리며 자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가족들은 온전히 눕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옹크리고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죽은 듯이 처박혀 있던 너구리는 인기척 없이 조용해지자 이것저것 허겁지겁 많이도 먹어치웠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너구리는 나가려고 여기저기 마구 긁고 다닙니다. 철없는 너구리는 문을 열어주자 꽁지를 주레찌고(말아 다리 사이에 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따라가려는 워리를 타일러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주 난장판을 해놓고 간 하룻밤 손님

너구리가 간 안방은 긁어 다 찢어지고 방안 구석구석에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간 고약하고 체면 없는 손님 때문에 날도 추운데 모든 식구가 나서 대청소를 했습니다. 문은 보기 흉하기는 하지만 뚫어지고 긁힌 자리 위에 그냥 문종이를 덧대 발랐습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모이면 하룻밤을 묵고 간 너구리가 잘 사는지 궁금해합니다. 암놈이니까 새끼를 낳아서 우리 집 뒷동산에서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순예 1945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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