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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엄마의 품격

‘수발력’ 레벨 경신을 위하여

분별과 판단을 의탁하기 전,
부모들은 자력갱생하시길

제1291호
등록 : 2019-12-11 11:17 수정 : 2019-12-1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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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근린공원에서 70대 노인이 운동에 여념이 없다. 연합뉴스
첫눈 오는 날, 뒷산 약수터에 있었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냉장고 기사가 오는데 냉장고 속이 꽉 들어차 있어 제대로 점검될지 걱정이란다. 화재 위험 때문에 10년 이상 된 냉장고를 제조사들이 무상 점검해주는 중이었다. 부모님 냉장고는 25년 된 그 이름도 찬란한 ‘금성’이다. 냉장고 속은 더 찬란하다. 역사와 전통의 현장이다. 본인도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것 같은데 “내 살림은 내가 한다”며 아무도 손 못 대게 하는 엄마의 소신을 이길 수 없다.

몇 년 전 무료입장권이 생겨 찾은 다른 동네 사우나에서 탈의실 위치가 헛갈려 두 차례나 연속 여자 탈의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변태 할배’ 취급을 받은 뒤로, 원래도 깔끔한 성격의 아빠는 매사 더욱 조심하고 삼간다. 통화를 마치니 그새 눈이 더 흩날린다. 겁이 났다. 작대기를 하나 주워 살살 짚어가며 내려왔다. 문득, 아빠는 하루하루가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끄러질까 자빠질까 끝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나중에 들었다. 친절한 LG 서비스 기사가 “별 탈 없고, 이만하면 깔끔하게 쓰시는 편”이라 말해줬단다. 그림이 그려진다. 노인 안심시키는 법을 아는 고마운 기사님.)

성정이 아빠와 반대인 엄마는 조심해야 할 것도 조심하지 않아서 한 번씩 자식들을 놀라게 한다. 무릎 절룩대는 걸 보다 못한 언니가 일부러 ‘원정’ 와서 함께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언니도 어깨 치료 중이다. 먼저 침을 맞은 엄마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양 의기양양해서 한의원 건물 지하에 있는 마트의 ‘미친 세일 데이’를 누볐다. 언니가 내려가 보니 배추를 다섯 통이나 사놓고 있더란다. 언니가 당황하며 이것만 나눠 들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씩 웃으며 당신 장바구니를 보여주기를, 이미 어른 허벅지만 한 무 세 통에다 두부, 호박, 참기름, 꽁치통조림 등등 미친 세일의 미끼 상품이 소복이 들어 있더란다. 평소엔 3만원어치면 배달해주는데 날이 날인지라 이날은 10만원부터 배달해준다 하고, 우군인 아빠는 전화를 안 받고, 가까이 사는 나는 마침 동네에 없던 터라, 언니는 막 쑥뜸에다 부항까지 뜬, 한의사가 절대 힘쓰지 말라고 당부한 왼 어깨를 오른 어깨와 나눠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데… 엄마 집까지 들어다드리며 그저 미친 세일을 원망할밖에.

나중에 내가 “엄마가 그 순간 서운해하더라도 그대로 반품시키지 그랬냐”고 하자, 언니는 자신의 모자란 판단력을 탓했다. 짐작대로 엄마는 다음에도 언니랑 같이 한의원에 가서 침 맞을 생각이 아니라 장 볼 생각에 부풀어올랐다. 맘 약한 언니는 몇 차례 더 어깨를 쓰게 될지 모른다. 나는 모른 척하련다. 언니가 힘들면 스스로 엄마를 설득하고 주저앉혀야 한다. ‘수발력’ 레벨 경신은 절로 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별해 처신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노쇠기에 접어든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물론 미리 주의하고 예방해도 덜컥 당황하고 좌절할 일이 생긴다. 최근 아빠는 무리해서 좀 먼 약수터에 다녀온 뒤 탈장이 되었고, 엄마는 모두가 우려하던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뒤 방광염으로 앓아누웠다. 나무라거나 탓해봐야 소용없다. 이미 본인들은 더 속상하다.

엄마는 이제 여행은 자식하고만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예약은 해드릴 수 있다고 했다. 아빠는 멀리는 말고 근교 어디 어디 정도만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눈 질끈 감고 호출 택시 전화번호를 드렸다. 나는 일상의 조력자이지, 이벤트를 위한 비서나 행사장 스태프가 아니다. 관계와 고민의 무게를 이해하고 되도록 나눠서 질 뿐 삶의 숙제를 대신 해주거나 나서서 해결해줄 수도 없다. 분별과 판단을 의탁하는 날이 오기 전에는 당신들 스스로 자력갱생했으면 좋겠다. 나는 나대로 내 성정과 역량을 가늠하며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더욱 잘 구별해 처신하겠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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