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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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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으면 뭐가 보일까

움직임연구소 ‘변화의 월담’ 워크숍
등록 2019-12-05 00:52 수정 2020-05-02 19:29
11월7일 서울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움직임연구소 ‘변화의 월담’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여러 동작을 하며 자기 몸을 탐색하고 있다. 김소민 제공

11월7일 서울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움직임연구소 ‘변화의 월담’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여러 동작을 하며 자기 몸을 탐색하고 있다. 김소민 제공

쌩쌩 땅이 지나간다. 내가 겁나게 빠르다. 바닥만 보고 달리면 그랬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앞서가는 아이의 등짝이 보인다. 내가 속한 그룹 아이들은 이미 결승점을 통과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는 다음 그룹의 일등이다. 초격차 꼴찌인 셈이다. 이 정도 꼴찌를 해버리면 장점도 있다. 다음 그룹의 이등처럼 보인다. 누군가 이렇게 위로했다. “네가 있으니까 일등도 있는 거야.” 내가 일등 빛내주려 달린단 말인가?

발이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나

내 몸은 내 부끄러운 식민지, 관리와 착취의 대상이다. 그 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지난 11월7일 아침 서울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20~60대 5명과 함께 발가락을 잡아 뽑았다. 발과 손으로 깍지를 끼니 여기저기 비명이 나왔다. 움직임교육연구소 ‘변화의 월담’이 이 센터와 함께한 ‘동네월담’ 워크숍에서다. 움직임 강사 리조가 말했다. “발 관절이 몇 개나 되는지, 곡선은 어떤지 보세요. 신발 안에 갇혀 있던 발을 손 대하듯 해보세요.” 내 발이 꽤 곱다.

“움직임은 중력과 관계를 맺는 거예요.” 나랑은 관계가 안 좋다. 무섭다. 목재 골조에 매달려보란다. 살짝 뛰어 잡아야 한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한참 엉거주춤 서 있었다. 매달리니 마카롱 손바닥이 찢어질 거 같다. 중력이 알아서 척추를 바로잡아준다는데 그럴 새도 없이 바로 떨어졌다. 화단엔 열무들이 자랐다. 종아리 절반 높이도 안 되는 화단 가장자리에 올라 걸었다. 또 무섭다. 다칠 일은 없다. 열무가 날 더 무서워해야 한다. 익숙하지 않으면 뭐든 겁부터 난다. 곁에 함께 발가락을 잡아당기며 울부짖었던 숙희씨가 서 있다. 언제든 내 손을 잡아줄 수 있게 거기 있다. 그래서 걸었다. 균형을 잃을 때마다 닿는 그 손이 따뜻했다. “어이쿠.” 모르지만 어쩐지 아는 것 같은 여자 숙희씨랑 웃었다. “자세를 고수할수록 균형을 잃어요. 움직임 속에서 균형을 잡는 거예요.” 두려워한 자세를 고수하는데 고수할수록 두려웠다.

11월7일 서울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움직임연구소 ‘변화의 월담’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여러 동작을 하며 자기 몸을 탐색하고 있다. 김소민 제공

11월7일 서울 돌곶이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움직임연구소 ‘변화의 월담’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여러 동작을 하며 자기 몸을 탐색하고 있다. 김소민 제공

개구리처럼 뛰었다. 풀쩍풀쩍. 10살 이후 자발적으로 해본 적 없는 동작이다. 센터 담은 내 어깨 정도까지 올라왔다. 리조가 먼저 보여줬다. “가상의 계단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그 계단이 나한텐 없다. 숙희씨랑 나는 발로 벽만 찼다. 긴 다리 승희씨는 몇 번 시도하더니 담 위에 올라섰다. 다들 ‘와’ 했다. 그 담에 올라가면 뭐가 보일지 안다. ‘한솔빌라’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렇게 담에 올라가보고 싶다. 새치를 휘날리며 풀쩍하는데 다시 애가 된 기분이다. 애가 돼야 신난다. 승희씨를 붙잡고 물었다. “담 위에서 보면 달라요?” “비슷한데요, 하하.”

강의 내내 리조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느껴보라고 주문했다. 그다음 주엔 동네 공원까지 4명이 뒤로 걸었다. “뒷면 감각을 깨워봐요.” 또 무섭다. 바로 뒷사람을 믿으며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리조와 함께 일하는 수민씨가 손을 잡아줬다. 따뜻해서, 울컥했다. 쨍한 하늘, 단풍, 그 아래 노인들이 앉아 있다. 할아버지 어깨 위로 은행잎이 떨어졌다. “발이 어떻게 땅에 뿌리내리는지, 고관절, 다리, 가슴, 척추, 머리가 어떻게 매달려 있는지 느껴보세요.” 의릉공원에서 서는 법을 배웠다. “우리 몸은 원래 불안정한 구조예요. 계속 미세한 균형을 잡으며 서 있어요. 내 안으로 향하는 시선,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같이 느껴보세요.” 팔을 뻗어 다들 삼각형을 만들었다. 하늘이 들어왔다. 한 동네 할머니가 “뭐 하냐”며 구경하다 자기도 머리 위로 삼각형을 만들었다.

리조가 시킨 쌀국수가 불고 있다. 내가 방해 중이다. 자기 몸을 알면 뭐가 달라지나? “내 몸의 감각, 어떤 반응과 신호를 보내는지 이해하다보면 내 몸이 정신이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으로 다가와요. 자기 몸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타인도 그렇게 보게 돼요. 타인이 내 목적을 이루려고 만나는 도구가 아니고 그 몸도 내 몸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돼요.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을 때 세상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죠.”

수고했다 열 마디보다 포옹

리조와 함께 ‘변화의 월담’에서 일하는 수민씨가 강의를 마치고 떠날 때 둘은 오래 못 만날 사이처럼 껴안았다. 누군가 정성을 다해 껴안아본 게 언제였을까? “(‘변화의 월담’을 함께하는 리조, 수민, 유닐) 저희는 삶을 회복하는 데 시간을 들여요. 서로 공감하고 만져주고 따뜻한 시간을 같이 보내요. 저는 수고했다는 열 마디보다 포옹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안으면 그 사람 몸을 읽을 수 있어요. 에너지를 나누고요. 왜 사람들이 그만큼 표현하지 않는지 물어볼 수 있어요. 우리 모두 쉽지 않은 삶을 살잖아요. 굉장히 많은 위로와 안정감이 필요한데 그걸 표현하면 나약한 거처럼 여겨져요.”

사실 1년 전부터 리조가 궁금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움직이는 ‘파쿠르’ 강좌 기사에서 강사인 그를 처음 알게 됐다. 지난해 6월 ‘변화의 월담’을 꾸리면서 리조는 “자아를 전시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해” ‘파쿠르’라는 말에 거리를 두고 있다.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는 아이는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선 운동 하면 엘리트 스포츠 중심이에요. 이게 수준이 높고 이게 잘하는 거고. 그런 평가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가요. 그게 자기에 대한 평가로 연결되죠. 몸의 경험으로 자기와 신뢰를 쌓는 시간을 얼마나 가질 수 있어요? 달리기하면 일단 속도가 들어가요. 몇 초 뛰느냐가 중요해져요. 사람은 왜 달려요?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싶어서예요. 호기심이죠. 뛰는 심장, 상쾌한 느낌 이런 걸 쌓을 수 있다면 달리기와 관계가 달라졌을 거예요. 환경을 탐색하고 내가 왜 탐색하는지 이유를 알고 살아 있음을 느끼고 돌아와 회복되는 일상을 가지는 게 중요해요.”

‘변화의 월담’은 어떤 담을 넘어 어디로 변하려는 움직임일까? 그 담을 넘으면 뭐가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안에 쌓은 담

“누구나 자기 안에 담을 쌓고 있잖아요. 방어기제를 쌓죠. 동시에 감정과 감각의 억압이 생겨요.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맞닿아 있죠. 사람, 사물과 상호작용하며 자기 안의 방어기제를 넘어 원래 자기와 연결돼보는 거예요. 그러려면 존재만으로 환영받고 환대받는 장이 필요해요. 정말 이 생명체에 엄청나게 복잡하고 심오한 원리가 있다는 걸 발견하면 누구라도 존중받을 존재가 돼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연민을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사랑과 맞닿게 되는 거 같아요. 생존이 아니라 살맛 나게 사는 삶을 위해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의 가장 작은 실천을 공유하려는 거예요.”

쌩쌩 땅이 지나가고, 심장이 후끈해지도록 한번 달려보고 싶다. 앞사람 등을 보면서가 아니라 옆사람과 함께.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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